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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문제 > 사회문제 일반
· ISBN : 9791158544737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3-12-01
책 소개
목차
1부_ 아래에서 본 우리
슬로니스 / 스키피오의 눈물 / 광대치레 / 땅 / 약속 / 기막힌 이야기 / 끄트머리 / 문화권력 / 3월의 교실 복도 / 고양이 방화주의보 / 외로움 담당 장관 / 치열함 /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 / 7:3의 법칙 / 경계 / 선한 마음 악한 마음 / 버추얼에서 루틴까지 /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 별의 순간
2부_ 위에서 본 세상
뭉크의 〈절규〉 / 팬데믹 / 이탈리아 / 어떤 확신 / 지속가능성에 걸다 / 예견된 미래 / 우주 한 알 / 시베리아 독수리와 북태평양 연어 / 달 마중, 달마 중 / 이상적 거리 / 닿아있다 / 400억 광년의 환희 / 부존재 경험 / 좋은 모형의 조건 / 불임의 논배미 / 사약을 권함 / 하풍죽로당을 구함 / 덤벙주초 / 경제논리 생존논리
3부_ 안에서 본 나
기상캐스터와 깐부 / 사이다 / 걷자생존 / 뒷모습 / 그런 말은 말자 / 비잉과 두잉 / 자각증상 / 옅어지다 / 실패해야 한다 / 누님세 / ‘화개장’으로 / 강의 단면 / 영혼을 깨우는 위대한 영혼 / 통감체감의 법칙 / 백년손님 사위의 눈물 / 비난받을 자격 / 전선이 구축되다 / 임윤찬과 마린 알솝 / 어느 정도의 무모함 / 행간을 넘어 뜻으로 읽음
4부_ 밖에서 본 너
그것은 거짓말 /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 모티브 / 무너지다 / 터, 기억의 다른 말 / 허수아비 효과 / 진짜 지리산에 사는 사람은 지리산 사람이라 말하지 않는다 / 전직죄인 / 여백 / 전화 한 통 / 경계표를 옮기는 자 / 보편성, 중간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 / 인상과 가상 / 편견 없음 / 틈바구니 철학 / 프리즘 / 이장학개론 / 베이스캠프 / 잼데이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리말]
글을 썼던 3년 반의 시간, 코로나19라는 세기적 사건은 인류사에 기록될 만큼의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글을 씀으로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제 개인의 삶도 그렇게 녹록지 않았지만 글을 고쳐 담으면서 불필요한 것들도 삼갈 수 있었습니다. 분명 글은 제게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었습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듯 이번의 글 또한 어쩔 수 없이 저 자신과 다름없습니다. 문장마다 옹이가 수두룩할 것입니다. 하지만 옹이도 저의 일부분입니다. 옹이가 나무의 무늬가 되듯 이번의 글도 3년 반을 그려낸 저의 무늬임을 고백합니다.
한 통의 편지가 왔다. 10년 전 내가 나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였다. 겉봉투는 ‘하동군수’ 명의의 발신인이 적혀 있고 수신인란에는 나의 아내와 두 아들의 이름이 익숙한 필체로 또렷하게 써져 있었다. 10년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당시에 기획계장을 맡아 군민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2110년에 개봉할 타임캡슐을 하동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에 매설했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그날 모인 사람들은 100년 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받은 편지는 미니 타임캡슐 행사로 10년 후에 개봉하여 발송하는 이벤트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에게 그리고 나의 분신인 예찬, 기훈에게…” 내용은 평범했다. 그동안 직장일로 가정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과 두 아들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과 기대감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우리 가족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작은 집을 지어 이사도 했고 나는 조기에 퇴직을 하여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두 아들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편지보다 기대 이상으로 그들의 길을 잘 걷고 있다.
나라도 바뀌었다. 사람도, 동네도, 하늘과 땅도, 이웃도, 친구도, 세계도 바뀌었다. 어제의 것들이 바뀌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진리도, 정의도 바뀌어가고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세상이 변한다는 것뿐이다.
이 편지가 감동을 주었다. 내용이 아니라 군수가 바뀌고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뀌었음에도 약속이 지켜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10년 편지’를 기획할 때만 하더라도 이 편지가 제대로 발송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약속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은 보여주려는 듯이 생각지도 않았던 편지가 약속이 되어 온 것이다. 1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군청 어느 장소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을 편지 캡슐은 편지에 쓰인 사연들을 얼마나 잘 지키며 살아가는지 지켜봤을 것이다.
남은 약속이 있다. 앞으로 90년 후 2110년 4월 15일, 우리는 하동문화예술회관 광장으로 가야 한다. 죽어도 가야 한다. 남은 약속은 그것뿐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 포옹하고 안부를 물어야 한다. 그러고 난 후에 캡슐을 개봉할 것이다. 진공 상태로 있었기에 10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타자기, 컴퓨터, 카메라, 사진, 책, 옷 등등 우리 손으로 모으고 정리를 했던 기록들을 반갑게 만져볼 것이다. 90년밖에 남지 않았다. 약속은 지키기 위한 것이다.
- ‘약속’
나는 이탈리아 북부 피사에서 제노바로 가는 완행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기차의 진행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다. 기차는 느리다. 반대 방향으로 앉으면 진행 방향으로 앉을 때보다 창밖의 사물들이 느리게 사라진다. 나는 이 기차에 앉아 이탈리아가 우리나라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적고 있다.
느린 걸음, 더 맑은 하늘, 푸른 잔디, 작은 카페, 그 카페에서 병아리 눈물만큼 작은 에스프레소 한 잔 두고 나누는 웃음과 대화, 약간의 무질서함과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질서, 본주르노와 차오! 차오! 하는 인사, 눈치 없는 큰 소리의 전화 통화, 당당한 담배 연기, 뒷골목에 버려진 쓰레기와 개똥, 창가의 화분, 붉은 지붕과 하얀 벽, 단조로운 해변과 비치파라솔, 그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반라의 사람들, 활엽수 나무와 그 아래의 벤치, 철도역에 버려진 객차, 이제는 다니지 않아 잡초 무성한 레일,
곳곳의 낙서, 타바키아라고 하는 우스운 가게, 부부나 연인끼리 잡는 손, 여자 버스 운전사, 큰 성당,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셀카봉 파는 흑인 총각들, 거리의 악사, 주인 따라 구걸하는 개, 창밖의 빨래, 공원과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높은 성과 성벽, 폰테라고 하는 오래된 다리, 피자와 발음이 비슷한 피아자와 피체리아,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퍼붓는 키스, 귀걸이와 피어싱, 문신, 찢어진 청바지, 로또 파는 가게, 어두운 현관과 방, 옛날 할머니들이 치마 속에 차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열쇠꾸러미, 시계탑과 그 아래의 작은 광장, 젤라또라는 아이스크림, 스쿠터 소리와 매연,
여행 가방과 배낭족, 시내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기차 승무원, 나이 많은 올리브 나무, 풍력발전기, 주말마다 열리는 야시장, 언덕과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동네, 텔레비전 안테나, 셀프 바, 우산처럼 생긴 소나무, 싸지만 괜찮은 호텔, 연착하는 기차, 가리발디와 쥐세페라는 이름의 거리, 동상, 나도 모르는 사이에 씌워져 있는 바가지요금, 바닷가의 기차역, 귀를 아프게 하는 앰뷸런스, 장갑차와 군인, 박물관과 미술관, 시티투어 버스, 트램, 미끄럼틀과 시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다시 펜을 들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거리의 정적, 소리를 앞질러 달리는 앰뷸런스, 군용차량들, 검은색 옷 입은 사람들의 행렬, 조화弔花, 할 일 없는 밀라노 광장의 비둘기, 멀리 퍼져 나가지 못하는 성당의 종소리, 사라진 거리의 악사들, 발코니에서만 들려오는 노랫소리, 시끄럽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사람들의 정적, 정적, 정적.
- ‘이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