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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58772635
· 쪽수 : 446쪽
· 출판일 : 2021-09-30
책 소개
목차
어떤 정사(情死)
무지개를 건너는 청년
눈 위에 쓴 편지
겨울 바다
암울한 계절
소녀의 꿈
현해탄과의 밀어(蜜語)
시련의 꽃
회오리바람
차라투스트라의 고향
갈매기와 심포니
배신의 빛
부록 : 소설 이용구(小說 李容九)
저자소개
책속에서
장 검사는 창밖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기분이 되었다.
불기소 결정을 내릴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이유서를 쓰려고 하니 복잡한 난관에 부딪쳤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의 판단을 관철할 자신은 있었지만 일단 문서를 남기려고 하면 그 문서 자체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문서를 그렇게 꾸민다는 일이 결코 수월하지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장 검사의 불기소 결정을 누가 읽어도 지당한 것으로 하려면 줄잡아 한 여인의 생애를 망라한 긴 스토리가 필요한 것인데 검찰관이 작성하는 문서가 그렇게 될 순 없는 것이다. 설혹 그에게 문장력이 있다고 해도 검찰관으로서의 직책이 갖는 약속이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장 검사는 간단하게 불기소 결정의 이유를 조목별로 메모해 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감색이 더욱 짙어가는 느낌인 것을 보면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장 검사는 백정선이 검찰에 있어서 불기소 처분을 받을 것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불기소 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기울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오랜 동안의 불륜관계를 매듭 짓고 은폐하기 위해 이제 쓸모없이 되어 버린 남자의 자살을 정사(情死)라는 꾀임으로 유도하고 방조한 여자로서 낙인찍힐 뻔했던 여자를 무구하고 순수한 그대로 구출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를 흐뭇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 궁금증은 남았다.
‘도대체 백정선은 어떤 역정을 걸어온 여자일까’ 하는. -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를 욕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릇 악인(惡人)의 말 가운데도
들어둘 만한 것이 있다.
예컨대 ‘인생막불탄무상(人生莫不呑無常)’
하늘은 노(怒)하고 땅은 토라지고, 대기는 인간의 악의(惡意)로써 가득한 그런 곳, 그런 시대가 역사상에 더러 있었다.
이럴 경우 태양은 비참을 조명하기 위해서만 있고, 토양은 독초(毒草)를 길러내기 위해서만 있고, 공기는 시취(屍臭)를 옮겨 나르기 위해서만 있고, 장미는 짐승 같은 사람들의 식탁을 장식하기 위해서만 피게 되는 것인데, 사람은 순량충직(純良忠直)하다는 죄로 고문당해야 하고, 남다른 이상을 지녔다는 죄로 학살당해야만 했다. 지옥이 그 계절을 연 것이다.
인간의 악의가 하늘을 노하게 하고 땅을 토라지게 한 것인지, 하늘이 노하고 땅이 토라졌기 때문에 악의가 대기를 채우게 된 것인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악의가 한때 이 나라를 휩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의의 회오리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았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이 사람도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의 하나이다. - 「소설 이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