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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지/출판 > 서지/문헌/도서관
· ISBN : 9791159056468
· 쪽수 : 704쪽
· 출판일 : 2021-12-20
책 소개
책속에서
메멘토 모리, 1968년 6월 15일
누군가 사납게 문을 두드렸다. 밤 11시 10분경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일까. 무슨 일일까, 문을 열었더니 아래 길가 아랫집에 사는 농사꾼 아저씨다. 집 앞 길가에 세 집이 있었는데 떡집 위로 다음다음 집 아저씨였다.
“큰일 났어요. 아무래도, 집주인이신 거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김 선생 들어오셨는지요?”
“아뇨, 아직…….”
“사고가 났어요. 타이어가 퍽,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암만해도.”
아내 김현경의 머리칼이 쭈뼛 선다.
“큰 소리가 나서 도로가 보이는 창문을 열어보니 버스가 서 있었어요. 잠시 후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아랫집 아저씨는 말을 잇지 못한다.
“방금 버스가 쓰러진 사람을 싣고 갔는데, 필시 김 선생 같아요. 빨리 그 버스가 어디로 갔나 찾아보셔야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아저씨는 울상이다. 부들부들 떠는 아내는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도 못한다. 오한 걸린 몸처럼 떨릴 뿐이다. 침착하자, 먼저 파출소에 가서 신고하자. 집 앞 언덕 위에 있는 파출소로 가려는데, 마침 순찰하는 지프차가 길가에 서 있다. 아내는 남편을 찾기 위해 지프차를 탄다. 마포 공덕동에 불켜진 병원이 있어 순경과 들어갔더니 의사가 말한다.
“아, 왔었어요, 우리 병원에서는 손 못 댈 상태라서 얼른 큰 적십자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방금 갔어요.”
아내는 다시 지프차를 타고 적십자병원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지냈던 아름답고 신기했던 혹은 부부싸움 했던 영상들이 고장난 영사기처럼 엉켜서 덜컹이는 차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 남편은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 있다. 사고 날 때 타박상인지 불어터지듯 부은 손에는 이미 시꺼멓게 멍이 퍼졌다. 거렁거렁 목에서 끓는 소리를 내는 그의 큰 눈은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그이가 술을 좋게 마시고 기분 좋게 들어오는 날 밤이면, 우리 집안은 무지개가 뜨는 듯 참으로 환하고 즐거운 집이 되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그는 두 아들을 숫제 광적으로 사랑합니다. 이 부실했던 아내까지도. 아이들과의 약속은 아무리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되어도 꼭 지켰습니다. ‘XX수련장’이 필요하다면 여하한 곳이든 샅샅이 뒤져 구해가지고 오는 열성 아버지였습니다. 아이들의 학교에도 잘 갔습니다. 물론 담임선생이나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몰래 갔다 와서는, 아이들의 거동을 지켜본 얘기를 제게 다정하게 하곤 했습니다”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177면)
아내 김현경의 표현에 따르자면 김수영은 분명 두 아들을 ‘종교’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김수영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우리나라가 종교국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을 갖는다”(1연 1~2행)고 말한다. 이 시에서 종교라는 단어는 7번 나온다. 종교라는 단어는 김수영 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 시대에서 “위대한 것”이라고 할 때는 종교적일 때이다. 예이츠를 인용하면서도 종교적 성향을 들어 위대한 시인이 되는 근거로 제시한다. 김수영 시의 근저에는 ‘숨은 신’(Hidden God)의식이 숨어 있다. 여러 번 언급했듯이 거제 포로수용소 시절 3년간 그가 성경에 의존하여 살았다는 기록도 참고할 만하다.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설움 속에서 기댈 것이 없었던 김수영에게 성경은 적지 않은 힘을 주었나 보다. “의지할 곳이 없다는 느낌이 심하여질수록” 그는 “전심을 다하여 성서를 읽었”다. 성경에서 얻었던 초자아적 힘이 이후 아이들을 희망으로 보는 종교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 진정한 종교는 혁명이자 시의 정점이었다. 닭을 키우며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김수영이지만 그 ‘절망’은 시인의 “목뼈는 못 자른다”(1연 3행). 그것은 다만 “겨우 손마디 뼈를/새벽이면 하프처럼 분질러놓고”(1연 3~4행) 갈 따름이다. 절망적인 상황은 공부를 못하는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아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1연 5행)다라고 김수영은 단언한다.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는 “선생, 어머니, IQ”(1연 6행)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김수영은 판단한다. 아들 혹은 아이들이 갖고 있는 가망성에 대한 신뢰를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2연에서는 ‘상상’이라는 단어가 7번 나온다. “마당에 서리가 내린 것”는 “나에게 상상을 그치라는 신호”라고 하니 ‘서리’는 부정적인 의미로 연상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상이 있다. 앞에 있는 상상은 일종의 잡념이다. 헤겔이 말한 즉자적 상상일 수도 있다. 뒤에 나오는 상상은 메타적 상상이다. 시를 쓸 수 있는 창조적 상상이다. 마당에 서리가 내린 것은 나에게 시를 쓰는 후자의 상상을 그치라고 압박하는 신호라고 본다. 꿈은 잡념의 상상이지만, 내가 꿈을 그릴 때 그것은 창조적 상상이 된다. 술은 잡념을 일으키지만, 술에 취하여 마음 열고 대화할 때 창조적 상상에 이를 수 있다. “오늘부터” 잡념적 상상이 나를 창조적으로 상상한다. 의미 있는 상상을 하려면 종교적 상상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종교국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을 갖는다”고 한다. 김수영은 창조적이고 종교적 상상에 이르는 교육을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