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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91161111322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24-08-28
책 소개
목차
트리에스테의 언덕길_007
전찻길_036
히아신스의 기억_052
빗속을 달리는 남자들_069
부엌이 바뀐 날_088
굴다리 너머_106
마리아의 결혼_127
세레넬라가 필 무렵_146
아들의 입대_166
힘든 산 일을 마친 후처럼_190
새로운 집_210
떨리는 손_229
부록
오래된 연꽃 씨앗_254
스가 아쓰코에 대한 노트_278
옮긴이의 말 _310
리뷰
책속에서
나는 왜 이리 오랫동안 사바에게 마음을 써왔던 것일까. 아직도 20년 전 6월의 어느 날 밤 숨을 거둔 남편에 대한 기억을 그와 함께 읽었던 이 시인에게 겹쳐보려는 것일까. 이탈리아에서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틀림없이 변경의 도시인 트리에스테까지 온 것이 사바를 좀 더 알고 싶은 일념에서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어쩐지 불안해하고 있다. 사바를 이해하고 싶다면 왜 그가 편집한 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를 공들여 읽는 것에 전념하지 않는 걸까. 그의 시 세계를 명확히 파악하기에는 그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실제의 트리에스테를 보며 아마 거기에는 없을 시 안의 허구를 확인하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사바의 무엇을 이해하고 싶어 나는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을 걸으려는 것일까.
당시 무엇보다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동시에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비밀처럼 내게 다가온 것은, 이 어둑한 방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덮쳐 누르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장마처럼 그들의 인격 자체에까지 야금야금 스며들어 기존의 모든 해석을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가난’이었다. 나 자신이 조금씩 그 안으로 편입되어감에 따라 나는 그들이 안고 있는 그 ‘가난’이 단순히 금전적인 결핍에서가 아니라 이 가족을 차례로 덮쳤으나 살아남은 그들로부터 삶의 의욕을 빼앗아버린 불행에서 유래하는, 거의 파괴적이라고 해도 좋은 정신 상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가난한 채로 노년을, 그리고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그렇게 언도한 것처럼 그들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초등학교는 나왔으나 그다음 단계로는 도저히 진학할 수 없는 자식들도 어느새 부모와 같은 밑바닥 생활에 휩쓸렸다. 그들의 체념이라고도 예민한 분노라고도 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가, 여기저기 더럽혀진 계단 입구의 하얀 벽이나 한 손에 커다란 검은색 가죽 쇼핑백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시어머니와 동년배 노파들의 뒷모습에 들러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