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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문 에세이
· ISBN : 9791169090728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23-02-24
책 소개
목차
제1장_홀림
제2장_거대한 돌 책
제3장_공포를 좇아서
제4장_빙하와 얼음: 시간의 강
제5장_고도: 산꼭대기와 풍경
제6장_지도 밖으로 걸어가기
제7장_새로운 천국이자 새로운 지구
제8장_에베레스트산
제9장_눈토끼
감사의 말
옮긴이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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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당시 내겐 피켈〔얼음 곡괭이〕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두 개가 필요할 정도로 심하게 경사진 눈 비탈이었다.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피켈을 왼손으로 바꿔 쥐고, 오른손 손가락들은 최대한 곧게 펴서 눈 속에 찔러넣었다. 그것들이 피켈의 ‘픽’처럼 지렛대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초조하게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버넷과 동시대 거주자들이 알고 있었던 지구는 거대한 폐허의 이미지이거나 그림이었고, 또 매우 불완전한 형상이었다. 하느님은 인류의 불경함을 단박에 징벌하기 위해 구세계의 틀을 용해하고, 그 폐허 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풍경 가운데 가장 무질서하고도 가장 매력적인 산은 신의 본 의도에 따라 창조된 형상물이 절대 아니었다. 산은 사실 노아의 홍수가 물러갈 때의 잔여물이고, 대홍수로 인한 광폭한 수역학이 이리저리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며 지구 껍데기의 파편을 쌓아 생겨난 것이었다. 사실 산은 인류가 저지른 죄의 웅대한 기념품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 나는 수년 동안 산에 오르면서 ‘심원한 시간’에 놀라운 감정을 느껴왔다. 한번은 햇볕이 쨍쨍한 낮에 운모雲母가 많이 생산되는 스코틀랜드의 벤로어스 산봉우리 중턱에서 커다란 사각형 궤짝을 닮은 퇴적암을 발견했다. 그 뒷면에는 이끼와 풀이 무성하게 뒤덮인 채 자라고 있었다. 뒤로 몇 발짝 물러나 옆쪽에서 세심히 바라보니 이 큰 암석은 수백 개의 얇은 회색 암층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각 층의 두께가 침대 시트 한 장보다도 두껍지 않았다. 나는 각각의 암층이 1만 년의 시간을 부연해주고 있다고, 즉 100세기를 3밀리미터의 암층 두께로 축약했다고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