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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69572033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4-08-16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한낮 허상을 꾸다
한 편의 시네마에서 하나의 특별한 장면이 평생 기억에 남듯 몽롱한 나는 선잠 속에 기억이 생생한 허상의 판타지를 꿈꾼다. 아득히 들리는 해괴한 목소리 쉰 노파의 신음 같은 소리다. 몽블랑. 나는 파란 눈을 가진 늙은이야. 톱스타 배우가 늙어버렸어. 쭈굴쭈굴한 골 깊은 이마의 주름은 마치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 같아. 또 한 번 들리는 목소리는 가래가 찬, 거칠고 칙칙한 목소리였다. 아이를 갖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저 늙은이가 미쳤나? 뭔 애 타령을 하고 돌아다녀. 나는 노파를 힐난하며 노려본다. 그러나 허리 꾸부정한 노파의 배는 올챙이처럼 부풀 대로 부푼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였다. 오! 마이 갓. 이거 봐! 나는 평생에 아기를 가져보지 못했어. 두 번을 결혼했으나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소박맞고 쫓겨나 거리를 전전하다 우연히 노숙자 영감과 사랑을 나눴지. 하늘이 날 도운 게야. 젊어서도 안 생기던 애가 나이 80에 생긴 게야.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괴변도 생기드라구. 으흘흘흘 흘리는 노파의 음흉한 웃음에 내 팔과 다리에 우둘두둘 소름이 돋는다.
주책이거나 망녕이라구는 생각지 말어. 늙어 거무틱틱하지만 나는 샤방샤방한 미인이었어. 물론 젊을 때 소싯적 이야기지만, 세계적 미인이었다구. 클레오파트라보다도, 마돈나보다도 더 예뻤지. 그러면서 노파는 손거울을 들어 화장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나 좀 봐줘. 이쁘지? 예전만은 못하지만 말이야. 나는 헉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친다. 눈은 온전한 여우 눈이었다. 얼굴은 백색으로 창백하다 못해 푸른 빛이 났다. 짙게 이겨 바른 붉은색 루즈는 턱밑까지 녹아내려 온통 붉은 피 칠갑을 한 모양새였다. 히히 어때? 이쁘지? 히죽거리던 노파가 갑자기 나를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며 다가온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으악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나의 심신이 많이 지쳐 있나 보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엉터리 괴변의 꿈을 꾸다니 지겹고 난해했던 생활전선인 회사를 나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무료하겠구나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원하던, 하고 싶은 일이어서 책상 앞의 난 행복한 하루하루다. 그 재미에 잠자는 걸 잊으리만큼 열심이다 보니 심신이 지친 나머지 신경과민까지 겹친 과민성 콤플렉스가 주는 요주의 위험 신호가 아닐까. 어떤 하나의 사물에 신경을 곤두세워 그것에 탐닉할 때 정신적 허상이 보이듯이 내가 지금 그 일을 경험했던 거다. 머리가 지끈대고 어지럽다. 현실과 같은 생생한 판타지였다. 아직도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