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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한국문화유산
· ISBN : 9791186889282
· 쪽수 : 355쪽
· 출판일 : 2022-06-28
책 소개
목차
머리말 ‘강화돈대 르네상스’를 꿈꾸며
Intro 세계 유일의 희귀 유적, 강화돈대
돈대 꿰미길 첫 번째—강석해협의 강화돈대
1 ‘위태로움이 없다’—무태돈대
2 앞에는 바다, 뒤로는 평야—망월돈대
3 강화돈대 중 최고 걸작—계룡돈대
4 최고의 전망지에 버려진—석각돈대
5 큰길 가에 이런 아름다운 유적이!—삼암돈대
6 외포리 젓갈시장 옆—망양돈대
7 손대다 갑자기 멈춘 ‘미복원’—건평돈대
8 아름다운 반원형의 해넘이 명소—굴암돈대
9 폐타이어 계단이 말해주는 유적—송강돈대
10 잘못 알려진 것이 너무 많다—선수돈대
11 강석해협의 길목을 지킨다—장곶돈대
돈대 꿰미길 두 번째—강화 남해안의 강화돈대
12 호젓한 산길 1km 걸어간다—북일곶돈대
13 환상적인 봄의 아름다움—미루지돈대
14 동막해변의 제1명당—송곶돈대
15 초승달 모양의 아름다운 성채—분오리돈대
16. 17 철저히 버려진 쌍둥이—양암-갈곶 두 돈대
18 단정한 형태의 아름다움—후애돈대
19. 20 폐허로 방치된 형제 돈대—택지-섬암돈대
21 강화도 바깥의 유일한—동검북돈대
돈대 꿰미길 세 번째—염하 수로의 강화돈대
22 일본의 조선 침탈 첫 단추—초지돈대
23 외세 침탈을 제1선에서 막아낸—덕진돈대
24 돌출한 ‘용머리곶’에 앉은—용두돈대
25 손돌의 전설이 어린—손돌목돈대
26 신미양요의 격전지—광성돈대
27 ‘자라머리곶’에 자리잡은—오두돈대
28 기단만 복원한 ‘사직단’?—화도돈대
29 ‘별나무’가 지켜주는—용당돈대
30 큰길 가에 우뚝 선 성채—좌강돈대
31 철저히 버려진 산등성이 돈대—가리산돈대
32 갑곶돈대에는 ‘돈대’가 없다—갑곶돈대
33 염하 건너 문수산이 빤히 보이는—염주돈대
34 안내판 하나 없는 ‘폐허’—망해돈대
35 문수산이 한눈에 보이는 요충—옥창돈대
돈대 꿰미길 네 번째—강화 북안의 강화돈대
36 가장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월곶돈대
37 ‘강화외성’이 시작되는—적북돈대
38. 안내판 하나 없는 폐허—숙룡돈대
39 ‘높이’만 남아 있는—소우돈대
40 평화전망대 가는 길 옆의—석우돈대
41 군데군데 토축만 남아 있는—천진돈대
42 ‘별처럼 펼쳐진’—철북돈대
43 개성 송악산이 빤히 보이는—의두돈대
44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하는—불장돈대
45 문 옆 돌에 명문이 있는—초루돈대
46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까치아래돈대(작성돈대)
47 ‘거북이가 기어오른’—구등곶돈대
48 조금 손대면 원형 되찾을—광암돈대
49 접근로도 없이 쓰레기장이 된—인화돈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5개 멸실 돈대
50 정미소가 들어선—장자평돈대
51. 군 시설이 가로막고 있는—제승돈대
52 3~4m 석벽만 남은—휴암돈대
53 저수지 바닥이 된—낙성돈대
54 면석 한 개만 남아 있는—빙현돈대
저자소개
책속에서
<비변사등록> 기록에 따르면, 돈대의 성곽을 만들기 위해 그 전해 12월 1일부터 석재를 채취해 운반하기 시작했다. 채석장 약 1,700명, 축성 기술 인원 1,110명, 석수 400여 명 등 직접 공사에 15,972명이었고, 여기에 한양의 주물 기술자 50명이 추가되었다. 또 돌을 나르는 운석선은 75척으로 각 배의 사공과 격군 2명 등 3명이 투입되어, 대략 1,635명 이상이 돈대 축조를 위한 사전 석재 공사와 운반에 투입된 셈이다. 이후 추가 투입된 장비와 인력을 더하면, 석재를 캐고, 석재 운반과 그에 필요한 잡물을 나르는 배가 84척에 약 1,700명이 동원된 것으로 나온다.
이상으로 살펴보면 강화 돈대 축성에 총 투입된 인력은 대략 16,000명으로,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1천만 명이었던 점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거국적인 역사였다. 그 무렵 강화의 인구는 22,336명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돈대축조 기간은 강화에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인구가 북적거리는 시기였을 것이다. - <Intro-세계 유일의 희귀 유적, 강화돈대 > 중에서
340년 전에 축조된 해안 군사실설인 돈대가 지금까지 그 효용성을 인정받아 군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강화돈대가 역사적인 유물의 차원을 넘어 ‘살아 있는 유산(Living Heritage)’임을 확연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강화돈대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몇몇 돈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방치되어 있어 점차 그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석렬의 일부라도 남아서 보존되고 있는 돈대는 35개에 불과하다. (......) 340년 전 국토를 지키기 위해 온 민족이 거국적으로 세워놓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지금처럼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복원작업이 더욱 어려워질 것 같아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 <Intro-세계 유일의 희귀 유적, 강화돈대 > 중에서
광대돈대, 겨룽돈대로 불리기도 한 계룡돈대의 석문 입구를 들어서면 길쭉한 장방형의 내부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핸드볼 경기장 남짓한 직사각형의 3면은 석축을 올려 해변을 향해 정면으로 외적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숙식을 같이 하며 밤낮으로 우리 바다를 지켰을 것이다. 지금 강화 해안을 경계하는 해병대 병사들과 다를 게 없다. 옛날 그 장병들은 모두 시간과 함께 과거 속으로 떠내려가 버렸지만, 당시 저 돈대 한쪽에는 가마솥이 걸리고 천막과 볏짚으로 꾸려진 숙소들이 자리잡았으리라. 고향에서 농사짓다가 징집된 그 수많은 병사들 중에서 과연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장정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강화도에 이처럼 수많은 돈대들이 세워지고 병사들이 배치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화가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말의 강화도는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격랑의 역사 한가운데서 부침하는 섬이었다. - <3. 강화돈대 중 최고 걸작, 계룡돈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