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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 ISBN : 9791188990283
· 쪽수 : 364쪽
· 출판일 : 2019-02-28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부 만주인의 청나라
1장 만주인의 중국 정복
여진인이라는 낙인 / 만주인 선언 / 눈부신 승리
2장 청나라 특색의 왕조 체제
팔기 우대 / 만한병용 / 이번원
3장 통합과 번영의 시대
정치의 안정 / 영토의 팽창 / 번영의 그늘
4장 청나라 중심의 천하
만주인의 세계 / 학문의 독점 / 천하 밖의 사람들
2부 왕조 체제의 균열
1장 제국의 충돌
조공 질서와 자유 무역 / 무역 갈등과 아편 밀매
청영아편전쟁 / 새로운 질서
2장 내우와 외환
인구 증가와 생존 갈등 / 태평천국 / 영프 연합군
3장 정변과 양무
신유정변 / 정치 구조의 변화 / 양무운동
4장 내정과 외교
갑신역추 / 청프전쟁 / 청일전쟁
5장 경세와 개항
경세제민 / 조약 체제 / 외국 문물
3부 청말민초의 격랑
1장 황제와 태후
무술변법 / 의화단 사건 / 신정
2장 혁명의 여정
입헌운동 / 혁명운동 / 신해혁명
3장 민국의 혼돈
정국 불안 / 제2혁명과 제3혁명 / 남북 대립
4장 시민과 군벌
5·4운동 / 중국공산당 / 군벌 전쟁
5장 민국과 세계
신구 갈등 / 비밀 결사 / 국제 관계
4부 국민당의 중국 통치
1장 국민당의 승리
국민당 개조 / 국민혁명 / 국민정부
2장 안내와 양외
위초 작전 / 만주사변 / 중일전쟁
3장 종전과 내전
일본의 패퇴 / 국공협상 / 국공내전
4장 독재와 혁명
독재 정치 / 전시 체제/ 농촌혁명
맺음말 : 중국공산당, 신중국, 인민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 1부 2장 청나라 특색의 왕조 체제
건륭 시대 군기대신들 가운데 만주인, 몽골 팔기, 한군 팔기, 한인 등의 점유율을 산출해보면, 군기처를 누가 주도했는지 명확해진다. 건륭 시대 동안 군기처에서 한인의 비율이 높았던 때는 60년 중 6년뿐인데, 넓게 보아 몽골 팔기를 만주인으로 포함할 경우 단 3년만 한인이 군기처에서 간신히 과반을 넘었다.
만주인 군기대신이 항상 과반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만주인의 이익과 의사가 관철되는 구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륭 시대에 진행되었던 대외 원정이 실제로 그다지 큰 경제적 이익이 없었음에도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위신을 높이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었는데, 대외 원정이라는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사안이 내부의 반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군기처의 인적 구성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군기처의 만주인 대 한인 비율을 통해 만한병용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육부가 상층에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청나라가 내세운 만한병용의 실제 모습은 핵심 정책 결정 기구를 통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 건륭 시대까지 만한병용은 사실 한인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였고, 만주인은 사실상 모든 중요한 정책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 2부 1장 제국의 충돌
청영아편전쟁의 패배로 만주인들이 세운 청나라 중심의 천하에 흠집이 생겼고, 청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외부 세계를 바라보던 질서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분명히 청영아편전쟁은 이미 만들어진 청나라의 천하가 더 큰 세계 질서 속에서 변화되는 전환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청나라 사람에게 전혀 다른 세계가 등장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미 형성된 청나라의 천하가 변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질서는 사람들의 발에 맞는 신발과 같았다. 사람들은 신고 있는 신발이 해져서 더는 신을 수 없게 되었거나, 어떤 신발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새 신발을 사게 마련이다.
청나라가 외세와 대적하기 위해 강력한 화력을 가진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도입하거나 군대를 개혁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기 도입과 군대 개혁은 팔기 제도라는 청나라의 근간에 대한 변혁을 의미했고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 가경 시대 이후 청나라의 재정은 좋지 않아서 황제들도 근검을 외치고 있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급하고 전쟁으로 재정이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군사 개혁 문제는 현안으로 대두되지도 않았다.하지만 외부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움직임도 있었다.
- 3부 2장 혁명의 여정
자희태후를 중심으로 한 청나라 조정은 열강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의화단의 과격한 행위를 묵인했고, 상황을 오판했으며, 왕조의 위기를 자초했다. 신축조약 이후에는 신정을 통해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신정은 지방의 중앙에 대한 신뢰와 지지보다는 불신과 이반을 더욱 부추겼다. 지방의 총독과 순무는 중앙의 무리한 요구에 불만을 가졌고, 향신들은 중앙 조정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청나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다소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한편 이미 청일전쟁 패배 이후부터 청나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시도했던 세력들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