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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91191656275
· 쪽수 : 440쪽
· 출판일 : 2023-10-10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조선사회와 여성의 삶, 그 실체를 찾아서
1장 조선 건국 이후 『소학』을 읽다
1.『소학』으로 배우는 신유학
1-1. 주자학과 조선 그리고 소학
2. 세종, 『소학』을 장려하다
2-1. 텍스트로서의 『소학』, 그 체계와 저자∥2-2. 인문 군주 세종과 『소학』의 보급∥2-3.『소학』 교육과 과거시험
3.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면
3-1. 생활 속 유학의 근간∥3-2. 여자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3-3.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을 가르치다
요약과 정리
2장 혼인과 족보 그리고 제사
1.조선의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1. 조선사회와 여성의 위상
2. 족보를 보면 여성이 보인다
2-1. 가계 기록이자 공문서∥2-2. 15~16세기 족보들
3. 여성은 족보에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3-1. 여성을 둘러싼 기재 양식과 방법 아들을 먼저 적고 딸을 기록하다|재가의 윤리와 기록|외손과 양자, 그 친족 관념의 변화∥3-2. 혼인과 제사의 풍속과 변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다|상속과 제사도 아들 딸 균등하게
요약과 정리
3장 조선의 여성들은 재혼을 했을까?
1. 『안동권씨성화보』와 여성 재가
1-1. 가장 오래된 족보
2. 재가 기록에 나타난 조선사회
2-1. 혼인과 여부女夫∥2-2. 재가와 후부
3. 재가 기록과 분포가 말해주는 것들
3-1. 파별 ‧ 세대별 분포 양상 추밀공파와 복야공파|고려 말 조선 초에 집중된 재가∥3-2. 재가 기록과 사회적 의미 재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
요약과 정리
4장. 조선의 지식인 여성, 여성선비와 여중군자
1.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여성들
1-1. 조선 후기와 지식인 여성
2. 여성선비와 여중군자
2-1. 여성도 선비가 된다∥2-2. 유교적 인격을 갖춘 여중군자∥2-3. 유교적 소양을 갖추다, 여성선비와 여중군자
3. 읽고 쓰고 자각하는 지식인 여성들
3-1. 조선 후기 사회변동과 여성의 자각∥3-2.여성 선비들은 어디서 왔나
4. 임윤지당, 성인의 뜻을 사모하다
4-1.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 학문도 즐거이∥4-2.천지간에 있을 수 없는 글 『윤지당유고』∥4-3. 종부이자 여중군자의 삶
5. 이사주당, 오로지 주자를 스승으로 삼다
5-1. 널리 알려진 고결한 성품∥5-2. 시문보다는 유교 경학서와 역사서를 탐독하다∥5-3. 밤에 길쌈 불로 글을 읽어 문리를 깨치다
6. 강정일당, 학문으로 고통을 승화한 여성선비
6-1. 가학의 전통을 잇다∥6-2. 남편이 아내의 문집 『정일당유고』를 편찬하다∥6-3.『중용』을 기반으로 심성을 닦다 도리를 알려면 여성도 공부해야 한다|인식의 혁명적 전환과 여성군자|성인이 되는 길로서의 마음공부
요약과 정리
5장. 왕실 속 여중군자들
1. 소혜왕후, 당대 최고의 지식인 여성
1-1. 소혜왕후 한씨와 『내훈』∥1-2. 『내훈』은 어떤 책인가 저술 시기와 의도|저술 방식과 특성∥1-3. 『내훈』의 젠더 관련 명제들 남녀는 유별하다, 남녀칠세부동석|남편은 하늘이다, 부내부천|여성의 재가를 금지하다, 불경이부|삼종지도와 칠거지악∥1-4. 『내훈』의 사회사적 의미: 조선의 『소학』화, 『소학』의 조선화
요약과 정리
2. 혜경궁 홍씨, 저술로 한을 풀어낸 여중군자
2-1. 사도세자의 부인, 정조의 어머니∥2-2. 보고 들은 것을 종신토록 기억하다∥2-3. 언간으로 뜻을 전하다∥2-4. 언교, 한글로 내린 교서∥2-5. 궁중문학의 대표작 『한중록』
요약과 정리
3. 정순왕후, 수렴청정을 한 영특한 여주女主
3-1. 영조의 계비, 15세의 왕후∥3-2. 권세를 얻은 가문∥3-3. 언교와 국정 참여∥3-4. 수렴청정과 운영방식 언간의 수신자|인사와 상소에 개입하다
요약과 정리
4.순원왕후, 정국을 이끌어간 세도정치의 주역
4-1. 수렴청정을 두 차례나 한 여장부∥4-2. 순원왕후가 남긴 귀중한 언간 자료 ‘최고 명필’의 언간들|수렴청정과 가문∥4-3. 순원왕후 한글 편지의 내용들 조카 김병덕과 김병주에게 보낸 편지|정사를 함께 논한 재종 동생 김흥근|가문을 생각하는 마음과 경계|철종의 비 간택 문제
요약과 정리
맺음말 조선사회와 주자학, 그리고 지식인 여성
저자 후기
주석∥참고문헌∥도판 출처
저자소개
책속에서
1장 조선 건국 이후 『소학』을 읽다
『소학』은 『대학』과 일종의 짝을 이루고 있으며, 신유학으로서의 주자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적에 해당한다. 주희가 제자 유청지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할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한 것인 만큼, 주희의 관심 역시 특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희와 유자징을 공저자, 그러니까 두 사람의 공동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주희는 『소학』에 「소학서제」와 「소학제사」를 쓰기도 했다. 때문에 신유학, 주자학이라는 맥락에서 『소학』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라 하겠다. 고려 말 주자학의 도입과 더불어 『소학』이 전래, 수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주자학을 위한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건국은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 그처럼 세종이 적극적으로 『소학』을 권장한 것에 대해 이 책에서는 사상사라는 입장에서 그리고 남녀관계와 젠더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세종시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소학』의 보급과 전파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함의가 담겨 있었다. 정치체제 차원에서는 주자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명과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것은 『소학』과 『대학』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주자학) 사회의 구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소학』의 유행은 남성 우위, 나아가서는 남존여비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의 명제가 『소학』에 나온다고 해서 오랜 관습과 문화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없었다. 그런 명제가 큰 힘을 발휘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2장 혼인과 족보 그리고 제사
그 같은 상대적 평등성은 여성의 재혼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심지어 고려 왕비 중에도 재가녀가 있었다. 재가녀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차대나 불이익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재산상속과 제사 등에서 아들과 딸의 지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유학을 표방하는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유교사회로의 지향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유교사회로 탈바꿈할 수는 없었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족보에서 선남후녀 원칙이 아니라, 아들과 딸 구별 없이 출생 연령순으로 기록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유풍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양반 부녀자의 재가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후부’), 재가 사례는 『성화보』(1476)와 『가정보』(1565)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같은 양상은 혼인 양식에서도 확인된다. 고려시대의 경우, 결혼해서 처가에서 사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다. 이 같은 풍속은 조선 건국 후 국가에서 친영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유지되었고, 조선 후기에야 반친영이 이루어졌다. … 조선 전기까지는 재산상속 역시 균등하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몫에 대한 재산권이 보장되었다. 딸이 결혼했다고 해서 재산상속권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들과 딸에게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 이는 상속에 따른 의무도 균등했음을 말해준다.
… 요컨대 조선 사회의 유교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과 더불어 여성의 정절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경국대전』에 포함된 재가녀 아들에 대한 차별 규정은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성종 때 간행된 『경국대전』 과거시험 조목에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재가하거나 실절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는 문과, 무과, 생원, 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과거 금지라는 규제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화의 심화 과정, 다시 말해서 주자학적 예학禮學 윤리의 정착, 그리고 종법적 부계 친족 중심의 문중, 종중이 형성되는 과정과 더불어 조선사회는 부계 남성 중심 사회로 변해갔다. 족보에서도 외손을 기재하지 않고, 아들을 먼저 적는 방식이 굳어졌다. 이후 그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재가 금지의 윤리가 양반 사대부는 물론이고 평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점차 수절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3장 조선의 여성들은 재혼을 했을까?
현존하는 족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안동권씨성화보』(1476년)에 나타난 부녀자들의 재가 기록에 주목해보고자 했다. 『성화보』에는 딸의 이름 대신 사위의 성명을 적고 있다. 딸의 자리에 딸의 남편이라는 ‘여부女夫’를 적었다. 하지만 본관은 적지 않았다. 사위를 표기하는 양식은 여부, 여女, 서壻, 여자부女子夫 등 다양한 형태에서 여부로, 그리고 다시 여로 변화해 정착되어가는데,『성화보』는 그 중간 형태를 보여준다. 아울러 『성화보』에서는 초실初室, 중실中室, 후실後室, 삼실三室 등을 명기하여 시집간 딸의 혼인 형태를 밝히고 있다.
… 첫째, 거시적으로 볼 때 조선사회의 유교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불교가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고려사회에 비해, 조선사회는 주자학을 지배 이념으로 택한 만큼 기본적인 방향성을 달리했다.
… 둘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 초기에도 재가와 삼가가 현상적으로 분명히 존재했다. 1478년(성종 8) 조정에서 이루어진 조정 대신들의 재가녀 및 삼가녀 규제에 대한 논의가 이를 말해준다.
… 셋째, 앞에서 말한 거시적인 조선의 유교화 과정과 두 번째 현상으로서의 재가와 삼가 현상 사이에 배치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 넷째, 『성화보』는 고려 말 조선 초라는 변혁기, 다시 말해서 유교적인 사회질서가 굳어져가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말해주는 족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이 공존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