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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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독일 남부 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목사이자 선교사인 아버지와 유서 깊은 신학자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과 칼프에서 성장했다. 열다섯 살 때 재학 중이던 신학교를 그만두며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 헤세는 그해 6월 삶의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신경쇠약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인문계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니다 다시 학업을 중단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 등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며 글쓰기에 전념했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첫 산문집 『자정 너머 한 시간』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정 너머 한 시간』 출간을 결정한 독일 디더리히스 출판사의 대표 오이겐 디더리히스는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그 문학적 가치를 확신한다”라며 헤세에게 작가로서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책으로 독일 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헤세는 1904년 『페터 카멘친트』로 큰 주목을 받으며 일약 유명 작가로 발돋움했고,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청춘은 아름다워』 등을 발표하며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포로구호’에서 일하며 전쟁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정치적 논문과 선전문 등을 발표하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규탄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독일 내에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전쟁 기간 당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심리치료를 받았으며, 종전 뒤인 1919년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젊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작품성 역시 인정받아 베를린시에서 주관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했다. 이후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등 여러 작품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군국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이고 나치를 경계한다는 이유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나치 집권 이후에는 독일 내에서 작품의 제작과 판매가 어려워졌다. 종전 뒤인 1946년부터 독일에서 다시 헤세의 작품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했다. 1950년 브라운슈바이크시에서 주관하는 빌헬름 라베 상을, 1955년 서독출판협회에서 주관하는 평화상을 수상했다. 1962년 스위스 몬타뇰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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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학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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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오스트리아 빈 대학통번역대학원을 거쳐,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독문학과 철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슈투트가르트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국비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유럽어교육학부 독어교육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일 프리츠 펄스 연구소에서 문학치료사 훈련가 자격을 취득하였고,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헤세의 《데미안》, 베른하르트의 《보리스를 위한 파티》, 릴케의 《시작 노트》, 쇼펜하우어의 《논쟁술》,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프로이트의 치료기법》, 《문화 속의 불쾌》, 《기억의 공간》, 《이집트인 모세》, 《시와 인식》, 《신들의 모국어》, 《니체의 문체》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프로이트 프리즘》, 《문학적 기억의 탄생》, 《문학치료》, 《내면의 수사학》, 《감성독서》, 《반기억으로서의 문학》, 《이겨놓고 싸우기》 등이 있다. 그리고 평론집으로 《잘못보기》, 《토르소》, 에세이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을의 언어》, 《다이달로스의 슬픔》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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