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미학/예술철학
· ISBN : 9791195952700
· 쪽수 : 360쪽
· 출판일 : 2017-02-23
책 소개
목차
제 Ⅰ 부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1. 지옥에서 얻어낸 네 장의 필름 조각 13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위험들을 무릅쓴, 오늘날 그 이미지들을 바라볼 줄 아는 데 있어서의 우리의 무능력을 무릅쓴, ‘모든 것을 무릅쓴’ 네 장의 이미지. 제 임무를 수행하는 존더코만도. 생존 그리고 저항에의 권유: 외부로의 신호 발송. 사진 이미지는 증인의 임박한 실종 및 증언의 재현 불가능성의 접힌 곳에서 돌발한다: 바로 그 실재에서 이미지를 얻어내기. 은밀한 촬영 준비. 첫 번째 시퀀스: 제5소각로의 가스실에서 찍힌 화장 구덩이들의 이미지들. 두 번째 시퀀스: 넓은 곳에서, 비르케나우 숲에서 찍힌 옷이 벗겨진 여인들의 “호송” 이미지. 필름 통은, 치약 튜브 속에 숨겨진 채, “더 멀리 보내지기” 위해 폴란드 레지스탕스 조직에게 도착한다.
2.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35
1944년 8월의 사진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말을 건네며 그것을 반박한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의 첫 번째 시기: 보편화된 “탈상상” 기계장치로서의 “최종 해결”. 희생자들의 정신, 그들의 언어, 그들의 존재, 그들의 잔여물들, 그들의 실종의 도구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료들을, 이러한 실종에 대한 기억을 실종시키기. 단독적인 예외들에 의해 늘 반박되는 “역사 속의 이성”: 쇼아의 자료들은 이 예외들로 만들어진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전달되며 복제되는 데 있어서의 사진의 특수한 능력: 수용소들을 사진 찍는 데 대한 절대 엄금은 아우슈비츠의 두 사진 연구소의 활동과 공존한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의 두 번째 시기: 사유할 수 없는 아우슈비츠? 우리의 인류학의 기초를 재검토해야 한다(한나 아렌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우슈비츠? 증언의 기초를 재검토해야 한다(프리모 레비). 상상할 수 없는 아우슈비츠? 증인들의 말에 부여되는 동일한 주의를 이미지에 부여하기. 상상할 수 없는 것의 ‘미학적’ 공간은 역사를 그 구체적 단독성들로 인식하지 못한다. 로베르 앙텔므, 모리스 블랑쇼, 그리고 조르주 바타유가 그것을 따르지 않은 방법: 동류와 인류.
3. 역사의 바로 그 눈 속에서 51
기억하기 위해서는 상상해야 한다. 필립 뮐러에게서 이미지와 증언: 단자의 즉각성과 몽타주의 복합성. “사진적” 현재의 긴급함과 『아우슈비츠의 두루마리』 속 이미지들의 구축. “진실의 순간”으로서의 이미지(아렌트)와 사유가 약해지는 곳에서 돌발하는 “단자”(벤야민). 이미지의 이중 체제: 진실(태풍의 눈 속 네 장의 사진)과 모호함(연기, 흐릿함, 기록의 결함적 가치). 상상할 수 없는 것의 ‘역사적’ 공간은 이미지의 이러한 이중 체제를 인식하지 못하며 순수한 정확성과 순수한 시뮐라크르 사이에 너무 많은 것 또는 너무 적은 것을 이미지에 요구한다. 그 현상학에 대한 주의 없이, 끔찍함의 성상들로서 “현시할 수 있게” 된(수정된) 또는 단순한 기록들로서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시 구도가 잡힌) 1944년 8월의 사진들. 이 현상학의 요소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공간” 및 노출 과다는 그 존재조건 및 그 제스처 자체의 ‘시각적’ 흔적들을 구성한다. 이미지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부분, 결함적 자취이다. 당위적인 불가능함과 사실상의 필요성 사이의 ‘모든 것을 무릅씀’의 문턱.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 상상해야 한다”.
4. 닮은 것, 다른 것, 잔존하는 것 67
역사의 이미지들에 대한 시각적 고증을 위하여: 관점을 좁히기(형식적으로) 그리고 관점을 열기(인류학적으로). 그 자체로서 인간 이미지의 참극으로서의 1944년 8월의 사진들: “분리할 수 없는 것”(바타유)과 문제의 닮은 것. 사형집행자가 인간을 다른 것(“마네킹들”, “현무암 기둥들”)으로 예정할 때, 희생자는 세계의, 자신의, 꿈의, 그리고 인간 일반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저항한다(레비: “똑바로 서기”). 예술의 이미지들조차 유지하기: 부정확함 그러나 지옥의 단테적 형상의 진실(…… 모든 희망을 버리시오). 결함적 필요한 것으로서의 이미지의 동원: 정보 및 가시성의 부족, 제스처 및 현현의 필요성. ‘살아남은[/잔존하는] 사물들’로서 1944년 8월의 사진들: 증인은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빼낸 이미지들 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섬광의 시간과 흙의 시간, 순간과 침전: 시각적 고고학의 필요성. “과거의 진짜 이미지” 앞에서의 발터 벤야민.
제 Ⅱ 부
전체 이미지를 무릅쓰고
1. 사실-이미지 또는 페티시-이미지 81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논쟁적 귀환. 정치적 화제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 역사적ㆍ이론적 징후인 1944년 8월의 사진들. “쇼아의 이미지들은 없다”. ‘전체 이미지’를 실재 전체와 대조하기 위해 ‘실재 전체’를 절대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실재의 결함적 이미지들을 관찰하기 위해 실재를 역사화하는 것인가? 단독적 사실들과 보편적 테제들 사이의, 사유할 이미지들과 이미 사유된 이미지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논쟁. 경험으로서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교조로서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전체가 아니’라는 것. 수용소들의 이미지들: 잘못 보여졌고 잘못 말해졌다. “쇼아의 이미지들이 너무 많이 있다”. 이미지들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지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페티시-이미지의 테제, 사실-이미지의 경험.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사진적 “접촉”. 페티시: 전체, 정지, 차폐막. 이미지의 능력들에 관한 철학적 토론: 베일인가, 갈라진 틈인가? 이미지의 이중 체제. 상상계는 거울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베일-이미지의 우월성과 갈라진 틈-이미지의 필요성 사이에서. 수전 손택과 “부정적 에피파니”, 카-체트니크와 사진적 “황홀경”, 호르헤 셈프룬과 시선의 윤리적 순간. “우리 자신의 부재를 갑자기 목격하기”.
2. 자료-이미지 또는 외양-이미지 141
이미지들에 대한 역사적 “독해 가능성”에는 결정적 순간이 따르게 마련이다. 페티시-이미지에서 증거-이미지 및 자료-이미지로. 클로드 랑즈만 그리고 자료에 대한 거부: “상상력 없는 이미지들”. 영화감독과 “결정적인 것”. 검증된 자료와 혼동된 위조된 자료. “비밀 영화”의 가설 그리고 랑즈만과 셈프룬 사이의 논쟁. 이미지에 대한 과장적이며 사유되지 않는 확신. 자료를 재검토하기: 구상된 역사 속의 구멍, 사건의 입자. 역사 속 급진적 회의주의에 맞서. 실험과 더불어 증거를 재검토하기. 증언을 재검토하기: 쟁론도, 순수한 침묵도, 절대적인 말도 아니다. ‘완전하게’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이야기하기. 증인들의 생존의 저편에서의 존더코만도의 일원들의 증언. ‘아우슈비츠의 두루마리Rouleaux’, 증언의 파급, 그리고 1944년 8월의 사진 “통rouleau”. 외양과 진실 사이의 대위성의 저편에서 상상력을 재검토하기. “상상력 없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장-폴 사르트르, 또는 행위로서의 이미지. 준-관찰. 문인가, 창문인가? “이미지의 여백” 그리고 두 시퀀스의 순서: 사진들을 전도시키기.
3. 몽타주-이미지 또는 거짓말-이미지 187
네 장의 이미지, 두 시퀀스, 하나의 몽타주. 상상력과 몽타주를 통한 앎: 시간의 단독성들로의 진입. 이미지는 ‘무(無)’도, ‘하나’도, ‘전체’도 아니다. 클로드 랑즈만과 장-뤽 고다르: 구심적 몽타주와 원심적 몽타주. “어떤 이미지도” 쇼아를 ‘말해주지dit’ 않지만 “모든 이미지들”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parlent’. 극성에서 논쟁으로: 형용사 “mosaique”의 두 가지 의미. 단 하나의 전체 이미지인가, 부분적 이미지들의 남용인가? 기본 계기들: 알랭 레네에게서 기억과 현재, 마르셀 오퓔스에게서 자료와 증언. “우리가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랑즈만의 이야기-몽타주와 고다르의 징후-몽타주. 몽타주하는 것이 위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형식”을 돌발하게 하는 것이며 이미지를 변증법적으로 만드는 것일 때. “고증 테이블”: 영화는 역사를 ‘재몽타주함remontant’으로써 역사를 ‘보여준다montre’. 고야,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조토와 함께 몽타주된 다하우. 바울에 의한 부활의 천사인가, 발터 벤야민에 의한 역사의 천사인가? 완료가 없는 변증법.
4. 닮은 이미지 또는 가장 이미지 233
세 번째 관점의 시선 아래 대립되는 두 개의 관점. 몽타주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들’을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유사들’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닮은 것은 가장하는 것도, 동일한 것도 아니다. 꼭 닮고 다른: 찰리 채플린에 의한 유대인과 독재자. 재현할 수 없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변적 과장들.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윤리의 문제의 중심에 있는 이미지. 한나 아렌트와 정치적 능력으로서의 상상력. 어떤 점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하나의 역사의 “명예를 구할” 수 있는가? 구원은 부활이 아니다. 최종 해결Endlosung과 구원Erlosung: 카프카와 로젠츠바이크에서 숄렘과 벤야민으로. “과거의 진짜 이미지는 섬광처럼 지나간다”. 영화의 모델: 사라져버리지만 프레그넌시적인 이미지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에 의한 영화적 구원. 비판적 실재론: 이미지는 공간적·시간적 연속체들을 탈몽타주하고 재몽타주한다. 메두사와 마주한 페르세우스: 방패의 책략, ‘모든 것을 무릅쓰고’ 과감히 맞서 알려는 용기. 찢어진 상상력의 시대의 이미지: 문화의 위기. 과거의 이미지를 통해 시간의 현재를 열기.
서지 285
도판 목록 287
미주 289
리뷰
책속에서
이 ‘어두운 방’의 끔찍한 역설. 양동이에서 사진기를 빼내고 파인더를 조정하고 사진기를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첫 번째 시퀀스의 이미지들(도판 3-4)을 찍는 데 성공하기 위해, 사진가는 그 희생자들이 이제 막─아마도 아직 완전히는 아닌 듯─비워진 가스실에 숨어야 했다. 그는 어두운 공간 속에 물러나 있다. 그가 위치한 어둠과 경사가 그를 보호해준다. 그는 대담해진다. 중심을 바꾸고 전진한다. 두 번째 광경은 약간 더 정면이고 가볍게 더 근접했다. 따라서 더 위험하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으로, 더 포즈가 잡혔다. 더 선명하다. 마치 공포가 이미지를 얻어내는 이 작업의 필요성 앞에서 순간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왜냐하면 이 검은 화면공간은 이 이미지들이 이해되는 궁극적 지위(시각적 사건이라는 그 지위)의 흔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음영과 빛의 작용에 대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형식을 중시하는” 미술사학자 특유의 일시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이 이미지들의 ‘토대’ 자체를 이름 짓는 것이다. 그것은 내부(바로 그 순간, 사진가의 생명을 보존하는 죽음의 방)와 외부(방금 전에 가스살해된 희생자들의 끔찍한 화장)의 역설적인 문턱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증인의 말 속 표현(증인의 중단상태, 증인의 침묵, 어조의 무거움)과 대등한 것을 제공한다. 최악의 사진(도판 6)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 사진은 단지 “실용성”─당연히, 역사적─“없”을 뿐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현상학적으로 그 사진이 사진가에게서 나타내는 모든 것(조준하기 불가능함, 무릅쓴 위험, 긴급함, 아마도 걸음걸이, 서투름, 정면의 태양으로 인한 눈부심, 아마도 바람)을 잊는다. 이 이미지는 형식적으로 숨결의 끝에 있다. 순수한 “표현”, 순수한 ‘제스처’, 조준 없는(따라서 방향성 없는, 위도 아래도 없는) 순수한 사진적 행위. 이 이미지는 우리에게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에서 네 장의 클리셰가 얻어진 긴급조건으로의 길을 열어준다. 그때 이 긴급함은 또한 역사에 속한다.
이런 글에 대답해야만 하나? 읽기에 대한 이런 거부와 더불어 토론하나? 특질에 대한 논거들을 변형하고 개인적인 문제삼기(예컨대 바이츠만이 독단적으로 페티시스트 임상 도표 및 배교자라는, 즉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이라는 도덕적 지위를 나에게 만들어내는 방식에서, 또는 파뉴가 그녀에게는 “그 어디로부터도 유래하지 않은” 듯하기까지 해서, 나의 담론의 “기원들”에 관한 조사를, 그것을 제시하지는 않고, 요구하는 방식에서)에 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하기를 선호하는 공격에 맞서야 하나? 당연히, 나는 나의 분석이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는 자와는 늘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자가 나의 인격을 오류의, 그리고 더 나쁘게는 도덕적 추행의 화신 자체로 만든다면, 그래도 내가 토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