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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96837662
· 쪽수 : 320쪽
책 소개
목차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에필로그
후기_폴 엘리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그 일 하니까 지난달 폰차트레인 호수*에 나가서 본 영화가 생각난다. 린다와 나는 새 교외에 있는 극장에 다녀왔다. 성장이 멈춘 교외 벌판에 회칠을 한 분홍색 각설탕 같은 모습의 극장이 덩그러니 서 있다니 누군가 오판을 한 게 틀림없었다. 강풍이 파도로 방조제를 후려쳤다. 실내에서도 그 난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는 사고로 기억을 잃는 바람에 모든 걸 잃은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가족, 친구, 돈. 그는 자기가 낯선 도시의 이방인임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는 새 출발을 해야 했고 새로 살 곳을 마련해야 했고 새 직업, 새 여자 친구를 구해야 했다. 그 모든 상실, 영화는 비극이어야 마땅했고 그는 대단한 고통을 겪을 듯했다. 하지만 웬걸, 일은 그리 나쁘게 풀리지 않았다.
린다는 불행히도 잠자코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행복해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불행해했다─우리가 차도 없이 웬 벽지의 동네 극장에 와 있다는 이유로.(나는 차가 있어도 버스나 노면전차를 타는 게 더 좋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시내로 차를 몰고 가 루스벨트 호텔의 블루 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드는 것이다. 나는 마지못해 가끔씩 그 일을 한다. 그럴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럴 때면 린다는 지금의 나처럼 기가 산다. 눈은 초롱초롱, 입술은 촉촉, 그러고 둘이서 춤을 추면 그녀는 제 매끈하고 긴 다리를 내 다리에 문지른다. 이럴 때 그녀는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꼭 블루 룸에 대한 보답은 아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건 벽지의 극장이 아니라 이 낭만적인 곳에 와 기가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 지난 일이다. 린다와 나는 깨진 사이다. 내겐 섀런 킨케이드라는 이름의 새 비서가 생겼다.
물론 나야 이 끝내주는 여자들, 그러니까 내 비서들을 헌신짝 버리듯 잇따라 정복하고 버려왔다고 떠벌리고 싶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사실과 다르다. 그건 연애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관계들은 마샤 혹은 린다(섀런은 아직이다)와 내가 걸프 해안에 나가 거닐고, 쉽섬의 인적 없는 만에 누워 껴안고, 그러고는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세상이 이런 행운을 용납할까 의심하는 순수하고 부주의한 황홀감으로, 즉 누가 뭐래도 연애로 시작했다. 하지만 마샤의 경우든 린다의 경우든 연애는 우리의 관계가 머잖아 절정에 다다른다 싶으면 여지없이 끝나버렸다. 사무실 공기는 소리 없는 비난으로 무거워지곤 했다. 천 가지 속뜻을 담지 않고는 말 한 마디 또는 눈길 한 번 나누기가 불가능했다. 밤새도록 전화 통화도 있었는데, 내가 할 말을 찾아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반대편에서는 잔숨과 한숨 소리만 들려오는 긴 침묵이 주를 이룬 통화였다. 이런 긴 침묵의 통화는 사랑이 끝났다는 확실한 징후다. 암, 그건 정복이 아니었다. 결국엔 나의 린다들과 내가 서로 넌더리가 나서 작별이 즐거울 정도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