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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마쓰모토 겐이치 (지은이), 요시카와 나기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2009-10-12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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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책 정보

· 제목 :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일반
· ISBN : 9788932019925
· 쪽수 : 306쪽

책 소개

21세기 들어 이웃나라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가 증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과거사 문제 등을 비롯한 분쟁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법제화 문제, 신가이드라인 관련법과 헌법 개정 논의, 역사인식 논쟁 등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특히 이 논란의 중심에는 ‘내셔널리즘’을 축으로 하는 일본 우익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우익사상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은 21세기 일본의 거취를 전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
서문
제1장 우익이란 무엇인가
제2장 우익의 성립과 그 이후
제3장 우익의 사상
1. 사생일여 | 2. 낭만주의 | 3. 농본주의 | 4. 천황론 | 5. 제2유신론 | 6. 내셔널리즘 | 7. 아시아주의

제2부 우익의 논리와 활동
제1장 신우익과 신좌익의 역전현상
제2장 국가개조운동의 성립?노장회에서 유존사로
제3장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의 분립
제4장 우익사상 연구의 갈림길
제5장 근대 일본의 흑막풍토
제6장 내셔널리즘 재평가의 흐름

제3부 일본 우익과 만주 문제
제1장 일본 농본주의와 대륙?가토 간지를 둘러싸고
제2장 만주국의 건국과 그 사상적 기저
제3장 만철 조사부론
제4장 미쓰카와 가메타로와 삼국간섭

제4부 우익의 종언
제1장 기리야마 가사네의 『파르티잔 전설』을 둘러싸고
제2장 “우익은 끝났다”는 이야기
제3장 스즈키 구니오의 『탈우익선언』을 둘러싸고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최초 수록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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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마쓰모토 겐이치 (지은이)    정보 더보기
문예 평론가, 작가, 역사가, 사상사가.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역사와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일본 근대사와 동아시아 사상사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좌도 우도 아닌 일본을 그려내는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우익’ 을 최초로 ‘사상’의 측면에서 다룬 학자로 알려져 있다. 1946년 군마 현에서 태어났다. 1968년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호세이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문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현재 레이타쿠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71년에 출간한 《청년 기타 잇키》로 큰 주목을 받았다. 파시스트 혹은 사이비 혁명가로 불리며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기타 잇키를 천황제 일본과 격렬하게 대결했던 혁명 사상가로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놀라운 충격을 주었다. 이후 30여 년에 걸친 그의 기타 잇키 연구는 2004년에 출간된 《기타 잇키(評傳 北一輝)》로 완결되었다. 천황제 신화를 폐기하고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가공할 상상력의 소유자, 좌와 우를 아우르며 ‘마왕’으로 불렸던 ‘카리스마’ 기타 잇키의 삶과 사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쓰모토 겐이치는 《기타 잇키》로 2005년 “역사서로서 뛰어난 문학성을 획득”하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바 료타로 상’을 받았다. 또 “위험한 혁명 사상가를 중심에 둔 보기 드문 독창적 근현대사 연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기타 잇키론》 《일본 우익 사상의 기원과 종언》 《일본의 내셔널리즘》 《다케우치 요시미 ‘일본의 아시아주의’ 정독》 《마루야마 마사오 ― 8·15 혁명 전설》 《평전 사이토 다카오》 《미시마 유키오의 2·26 사건》 《쇼와 천황》 《해안선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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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카와 나기 (옮긴이)    정보 더보기
번역가.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근대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가 있으며, 한국에서 출간된 번역서로 다니카와슌타로谷川俊太郞 시집 『사과에 대한 고집』, 사노 요코와 최정호의 『친애하는 미스터 최』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최인훈의 『광장』, 박경리의 『토지』 등의 소설과 신경림, 오규원, 김혜순 시인의 작품 등을 번역해서 소개했다. 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번역으로 제4회 일본번역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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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우익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을 지배했다는 설이 있다. 생각건대 이는 전후 민주주의가 창조한 신화다. 그것이 신화인 까닭은, 좌익이 전후 일본을 지배했다는 언설을 대치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좌익은 전후 일본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전후 일본의 지배자는 진주군 및 진주군과 결탁한 리버럴liberal들이었으며, 그들은 진주군과 손을 잡음으로써 처음은 민주화, 후에는 우경화를 추진했다. 좌익은 그 출발점에서 리버럴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 극단적으로 말하면, 근대 일본의 정치란 좌우 양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노릇이었다. 리버럴은 때로는 극우를 잘라버리면서 오른쪽으로 다가섰고, 때로는 극좌를 잘라버리면서 왼쪽에 동조해서 권력을 유지해왔다. 그들은 그 균형감각으로 인해 계속 지배계급이 되어왔다. 그들은 좌우 양익의 틈새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문명개화의 논리, 바꿔 말하면 근대화─자본주의화, 중앙집권화, 탈아화(脫亞化), 합리주의화─를 밀고 나갔다.
리버럴이 틈새에 낀 좌우 양익이라는 구도는, 그러나 좌우익의 논리를 약간 벗어날 것이다. ‘좌익’ ‘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 후의 의회에서 의장의 왼쪽 자리를 급진파 자코뱅당이 차지하고, 오른쪽 자리를 보수파가 차지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 후 급진파 자코뱅당의 계보를 잇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좌익이 되고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우익이 되었다. 그렇다면 보수파와 우익은 거의 동의어가 될 것이며 리버럴=보수파를 사이에 낀 좌익과 우익이라는 구도는 당연히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 보수파는 꼭 우익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보수파는 리버럴이었고 리버럴들은 좌우익을 거의 같은 거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일본이 선진자본주의 열강 밑에서 늦게 근대화를 추진해야 했다는 특수사정 때문이었다. 즉, 근대화론자인 리버럴이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는 것을, 이 특수사정이 요청한 것이다. 그런고로 근대화 노선을 밀고 나가는 메이지(明治) 국가체제에 대한 반대자가 두 방향으로 나뉘게 되었다. 대충 말하자면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에 반대하는 우익과, ‘계급’의 입장에서 반대하는 좌익이 그 두 방향이다.
물론 우익과 좌익이 각각 발생한 경위를 살펴보면 우익의 경우에는 ‘민족’의 입장보다 먼저 ‘국권’의 입장이 있고, 좌익의 경우 ‘계급’의 입장보다 먼저 ‘민권’의 입장이 있다고 하는 게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불완전하나마 네이션 스테이트(근대국가)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는 국권론자와 개인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권론자는 다 근대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나눠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직 메이지국가의 반체제파가 아니라 메이지 국가체제의 보완자(補完者)에 지나지 않았다. (제1부 제1장 우익이란 무엇인가, 16~18쪽)


우익의 낭만주의는 좌익의 리얼리즘과 대항관계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우익에 있어서 좌익의 반(反)자본주의, 즉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꼭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우익사상은 자본주의 옹호로 간주되어버릴 것이며, 실제로 체제에 편입된 우익은 자본가계급의 앞잡이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익에도 반자본주의사상이 있었다. 농본주의가 그것이다. 반배금주의(反拜金主義)라는 유치한 말도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혁명사상으로서의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은 곤도 세이쿄(權藤成卿, 1868~1936)와 다치바나 고자부로(橘孝三郞, 1893~1974)의 농본주의이며, 그들 다음가는 사람으로 나카자토 가이잔(中里介山, 1885~1944), 시모나카 야사부로, 니시다 덴코(西田天香, 1872~1968)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반자본주의사상이 왜 농본주의의 형태를 취해야 했을까.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공업화를 위한 노동력으로 농민을 농촌에서 흡수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농촌은 항상 피폐하고 도쿄는 자본주의의 도읍으로서 농촌을 착취하면서 불건전하게 비대해졌다. (제1부 제3장 우익의 사상, 64~65쪽)


일본 내셔널리즘이 구미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압박 밑에서 저항으로 성립한 사상이었던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내셔널리즘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메이지유신으로 겨우 식민지화를 면한 일본 사람들이 그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거나 식민지화되려고 했던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운동에 동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식민지화되는 것에 대한 위기감은 일본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니 이것을 동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이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위협에서 완전히 탈각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구미를 모방하면서 탈아화(脫亞化)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내셔널리스트=우익이 채택할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익은 또 하나의 길, 즉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아시아와 연대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동정 때문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아시아와 연대하게 된 것이다. 〔……〕 어쨌든 아시아주의는 여기에서 성립된다. 이것은 내셔널리즘과 같은 사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시아주의는 당연한 것처럼 우익을 특징짓는 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 즉 탈아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익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타도의 대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모방하는 것이었으니만큼 당연한 사태였으며 이 시점에서 아시아의 부흥, 그리고 이를 위해 연대를 바라는 아시아주의와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모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했다. 〔……〕 하지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시아주의를 유지하는 척하면서 침략적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 아시아를 찾아 손을 잡았다. 이것은 아시아주의의 타락이지만, 그것이 타락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시아주의자를 소외해온 지배계급이 기꺼이 아시아주의자를 환영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1940)과 대동아문학자대회(1942)가 그 시늉의 전형이다. (제1부 제3장 우익의 사상, 87,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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