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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동유럽소설
· ISBN : 9788937429675
· 쪽수 : 136쪽
책 소개
목차
그리지아
포르투갈 여인
통카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이상하게도 꽃이 만발한 숲 주변 초원의 이미지가 그의 흥분된 감정과 결합되어 있었다. 미래를 동경하면서도 자신이 이 아네모네와 물망초, 난초, 용담과 멋진 녹갈색의 승아 사이에서 죽은 채로 누워 있게 되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는 이끼 위에 몸을 쭉 뻗고 누워서 “어떻게 너를 저 너머로 데려가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기 직전의 미소 지은 얼굴처럼 몸은 굳어 피로해졌다. 지금껏 자신이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모든 인간들과 다른 존재로 느끼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이 있을까?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몸과 내면에 종속된 듯 느껴지는 것, 그래서 그 존재의 배고픔과 피곤함, 청각과 시각이 자신의 육체와 밀접하게 이어지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이 있을까? (……) 모든 세속적인 생각들은 자취를 감추고 권태나 부정(不貞)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잠깐의 경솔함 때문에 영원을 희생시킬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처음으로 사랑이 숭고한 성사(聖事)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삶을 이렇게 고독하게 바꾸어 놓은 신의 섭리를 인식했다. 발아래 금은보화로 가득한 대지가 이제는 세속적인 보물이 아니라 그에게 배정된 마법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리지아」에서
그에게 익숙한 생활은 전략이나 정치적 기만, 분노와 살생이었다! 모든 사건은 이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 때문에 일어난다. 주교는 금화를 믿었고 케텐 영주는 귀족들의 저항 정신을 믿었다. 명령은 분명하다. 이런 삶은 명백하고 확고부동하다. 갑옷이 밀려났을 때 목덜미 아래를 창으로 찌르는 일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삶은 달만큼이나 멀고 낯설다. 케텐 영주는 그 낯선 삶을 내심 사랑했다. 규칙이나 재정 운영, 부의 축적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몇 년째 싸우고 있지만 그가 갈망하는 것은 승리를 통한 평화가 아니었다. 진정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 케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꽃이 만발한 들판을 달리다가 말이 반항하고 요동치면 박차를 가해 말을 달래며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럴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자기와는 다른 삶을 모른다 해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으며, 죽고 사는 일은 다 마찬가지니 말이다. 이런 삶은, 가만 들여다보면 불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는 일, 꿈을 꿔서 뻣뻣해진 몸을 일으켜 뒤돌아봤을 때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부정하고 몰아내 버렸다. 케텐 영주는 자신에게 온갖 짓을 저지르게 하는 주교를 생각할 때면 뒤엉킨 실타래처럼 마음이 뒤죽박죽이었다. 이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은 기적뿐이었다. -「포르투갈 여인」
사물들에 관해 말하자면, 사물 자체보다도 사물이 틀림없이 거기 있다는 믿음이 더 중요했다. 세상을 세간의 눈이 아닌 자기 시각으로 보면, 세계는 밤하늘의 별처럼 슬프게 서로 떨어져 살아가는 무의미한 낱낱으로 분리된다. 창밖을 내다보기만 해도 갑자기 저 아래에서 대기하는 마부의 세계 속으로 길을 지나가던 공무원의 세계가 비집고 들어왔고, 거리는 조각나고, 구역질 나는 것들로 뒤죽박죽 뒤섞였으며, 세계 긍정과 자기 신뢰라는 궤도의 구심점에도 혼란이 생겼다. 이 모든 분리와 혼란 상태는 위도 아래도 없는 세상을 똑바로 걸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욕망과 지식과 감정이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그런데 우리는 실마리를 놓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깨닫곤 한다. 혹시 진실의 실마리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 냉정한 겉치레가 그를 다른 모든 것과 분리시키는 순간, 통카는 동화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는 거의 하나의 소명과 같은 존재였다. -「통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