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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기타 국가 소설
· ISBN : 9788937464553
· 쪽수 : 344쪽
· 출판일 : 2025-01-24
책 소개
목차
1부
낯선 사람으로 가득한 식탁 13
지옥 불 37
엘리베이터 보이의 사악한 선행 51
애그니스 스트리트 83
홍합선 96
슈베어 146
2부
유산 155
더 세인츠 168
기록 보관소에서 177
아서 매캐시 188
일하는 어머니 195
나이팅게일 마룻바닥 220
지붕 위의 소년 233
물새 사냥 245
폭격기들의 밤 256
떨림 261
북두칠성 266
작은 단도들이 낸 길 293
담장 있는 정원 311
작가 연보 339
책속에서
1945년, 부모님은 범죄자 비슷한 두 남자에게 우리를 맡기고 떠났다. 우리 집은 런던의 루비니 가든이라는 거리에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였던가 아버지였던가, 식사 후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더니, 두 분이 앞으로 일 년간 우리를 떠나 싱가포르에서 지내다 올 거라고 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짧은 여행도 아니라면서. 물론 그동안 우리를 잘 돌봐 줄 사람을 구해 두었다고 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뛰어넘었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베드퍼드셔의 칙샌즈 수도원, 그리고 그로
스브너 하우스 호텔 꼭대기의 “새 둥지”에서 헤드폰을 끼고—이쯤에서 누나와 나는 이곳이 ‘화재 감시’와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무전기에서 나오는 복잡한 주파수에 귀를 바싹 기울이며 독일군의 메시지를 가로채 영국 해협 너머로 전송하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지닌 존재임을 알아 가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흰 팔과 섬세한 손가락으로, 명확한 의도하에 사람을 쏘아 죽인 적도 있었을까?
우리가 나방과 살았던 첫 겨울이 지나갈 무렵 어느 날, 레이철 누나가 내게 지하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누나가 방수포와 상자 몇 개를 치우자, 어머니의 납작한 트렁크 가방이 드러났다. 저게 싱가포르가 아니라 여기, 지하실에 있다니. 마술을 보는 듯했다. 가방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하실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아마도 그토록 주의 깊게 개켜서 가방 안에 꾸려 놓은 옷들 사이에서 찌부러진 어머니의 시신이라도 발견할까 겁이 났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