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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신라/통일신라
· ISBN : 9788952237156
· 쪽수 : 200쪽
· 출판일 : 2017-08-25
책 소개
목차
제31대 신문왕
제32대 효소왕
제33대 성덕왕
제34대 효성왕
제35대 경덕왕
제36대 혜공왕
제37대 선덕왕
제38대 원성왕
제39대 소성왕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제43대 희강왕
제44대 민애왕
제45대 신무왕
제46대 문성왕
제47대 헌안왕
제48대 경문왕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
제52대 효공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제55대 경애왕
제55대 경애왕
<신라 연표>
저자소개
책속에서
684년(신문왕 4)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해서 유성이 나타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그 다음 달인 11월, 안승의 조카뻘[족자族子]되는 장군 대문(大文: 또는 실복悉伏)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러자 남은 무리들이 신라 관리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군대를 보내 토벌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했다.
이때 활약했던 핍실과 관련된 이야기가 『삼국사기』 「열전」에 전해진다. 사량(沙梁) 출신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 취도(驟徒)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성은 전하지 않지만 형제 셋의 이름은 남아 있다. 맏이는 부과(夫果), 가운데가 취도, 막내는 핍실(逼實)이다. 원래 취도는 출가하여 실제사(實際寺)에서 도옥(道玉)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서 신라군을 기습하여 싸우는데 전투가 결판나지 않자, “나는 모습만 승려일 뿐이니,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편이 낫겠다”며 군복을 입고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그렇게 해서 삼천당(三千幢)에 배속된 그는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문무왕이 백제 부흥 세력을 토벌할 때, 취도의 형 부과도 큰 공을 세우고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절도 없이 놀았다는 비판이 나와 있다. 그 결과 기강이 문란해지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
그렇게 태어난 혜공왕은, 원래 여자의 천성을 가졌기 때문에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여자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몰아갔다. 그래서 8살에 왕위에 오른 후, 태후가 섭정에 나섰어도 정국이 수습이 되지 않아 도적 떼가 날뛰었다는 식이다. 이것이 표훈의 경고였고,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다.
혜공왕에 대해 이런 정도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당시 귀족들이 경덕왕 때부터 혜공왕 때까지 이어져온 개혁 방향에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안은 정변으로 이어졌다.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 들어온 것이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 등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그 와중에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양상 등은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붙였다.
애장왕을 살해한 언승(彦昇)이 헌덕왕(憲德王)이다. 그는 애장왕의 뒤를 이어 809년(헌덕왕 1)에 즉위했다. 소성왕의 친동생인 그는, 790년(원성왕 6)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와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791년(원성왕 7)에는 반란을 진압하며 잡찬이 되었다. 794년(원성왕 10)에 시중, 다음 해에 이찬 관등을 받아 재상 반열에 올랐다. 796년(원성왕 12)에 병부령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고, 800년(애장왕 1)에 각간, 다음 해에 어룡성 사신(私臣)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상대등이 되며 거침없이 출셋길을 달렸다. 그랬으나 결국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