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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54626125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14-10-24
책 소개
목차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
해설 | 그렇게, 제발트를
W. G. 제발트 연보
리뷰
책속에서
외국 도시에서 지인들에게 헛되이 통화를 시도하는 행위는 참으로 큰 공허함을 자아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의 감정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섰고, 다이얼을 돌리는 이 행위가 마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도박인 듯이 느껴졌다. 그러므로 전화기에서 다시 튕겨나온 동전을 집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런 계획 없이 밤이 될 때까지 다시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그러느라 너무 지친 탓인지,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창문을 여니 채찍처럼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안개에 젖은 공기가 와락 밀려들었다. 기차는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구간을 달리는 중이었다. 끝이 쐐기처럼 날카로운 검푸른 바윗덩이들이 금방이라도 기차에 닿을 듯 가까이 불거져 있었다. 나는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바위 꼭대기가 어디쯤인지 살펴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거칠고 좁다란 골짜기가 어둠 속에서 계속 이어져 있었다. 개울과 폭포가 매우 가까이에서 흐르고 있었기에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밤공기 속에서 흰 물보라를 내뿜는 차가운 물의 기운이 얼굴에 그대로 느껴졌다. 프리울리의 기운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겨우 몇 달 전 프리울리에서 일어난 재앙도 잇달아 떠올랐다.
이 도시 깊숙이 발을 디디는 사람은 자신이 다음 순간에 무엇을 보게 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으며, 누가 자신을 지켜보게 될지도 예상할 수 없게 된다. 한 무대에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반대 방향에 있는 출구를 통해 무대를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