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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 걸작선 1

환상문학 걸작선 1

(19세기 대문호들의 명작 단편선)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F. 드 라 모트-푸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요한 루트비히 티크, 아힘 폰 아르님 (지은이), 차경아 (옮긴이)
자음과모음(이룸)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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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 걸작선 1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환상문학 걸작선 1 (19세기 대문호들의 명작 단편선)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57077238
· 쪽수 : 704쪽
· 출판일 : 2013-01-23

책 소개

괴테, 노발리스, 푸케, 샤미소, 호프만 등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독일 작가들의 중단편 명작들을 두 권으로 엮었다. 기묘하고 아름다운 21편의 이야기를 통해 각 작가들은 흥미로운 상상력과 함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동시에 전한다.

목차

1권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푸케
운디네 7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왕의 신부 157
황금 항아리 251

아힘 폰 아르님
아라비아의 예언자, 멜뤽 마리아 블랭빌 409
종손들 이야기 463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가을의 마법 535
리버타스와 그녀의 청혼자들 565

루트비히 티크
금발의 에크베르트 625
요정들 659

옮긴이 약력 701
연대순에 따른 작품 순서 703

2권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 7

빌헬름 하우프
황새가 된 칼리프 이야기 105
난쟁이 나제 129
원숭이 인간 183

에두아르트 뫼리케
보물 217
농부와 그의 아들 335

클레멘스 브렌타노
비첸슈피첼 이야기 353
클롭스톡 교장 선생과 다섯 아들의 이야기 371
장미꽃잎 공주 45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메르헨 479

노발리스
히아신스와 장미 꽃잎 전설 541
클링스오어 이야기 551

옮긴이 약력 603
연대순에 따른 작품 순서 605

저자소개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독일 후기 낭만파의 대표적 작가인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는 1788년 3월 10일 오버슐레지엔(현재 폴란드령)의 루보비츠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805년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807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쳐 1812년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마쳤다. 학창 시절 레겐스부르크, 뉘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등 여러 지역을 여행했던 경험들이 《낭만 건달》에도 녹아들어 있다. 1808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도나우 우편선을 타고 빈으로 여행했던 것도 그중 하나다. 1809년 베를린에서 낭만주의 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 아힘 폰 아르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교류했으며, 1813~1815년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조국 해방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아이헨도르프는 오랜 기간 법률가로 공직에서 일하다가 1844년 중환으로 은퇴하여, 생애 마지막 10년간 많은 작품을 썼다. 1857년 오버슐레지엔의 나이세에서 69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아이헨도르프는 지금도 예찬받고 있는 서정시인이자 소설가로서 수많은 시와, 소설, 희곡, 다양한 주제의 평론, 문학사 등을 집필하였으며, 그의 많은 시들은 가곡으로 만들어져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단편으로 낭만주의 청춘 문학의 대표작 《낭만 건달》(1826)을 비롯하여 《가을의 마술》(1808), 《대리석상》(1819) 등이 있으며, 장편으로 《예감과 현재》(1815), 그리고 《이별》(1810), 《아침 기도》(1814), 《달밤》(1837) 등 수많은 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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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 푸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77년 하벨 강가의 브란덴부르크에서 태어나 1843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칼 드 라 모테 푸케 남작(Friedrich Heinrich Karl Baron de la Motte Fouque')이라는 독일 세례명과 드 생 쉬렝 남작, 드 라 그레브 영주(Baron de Saint-Surin, Seigneur de la Greve)라는 프랑스 세례명을 가진 그는 프로이센 국민이었으나 조상은 프랑스 귀족이었다. 그의 이름 프리드리히는 대부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의 대부가 된 것은 조부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푸케의 조부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테 푸케(1698~1774)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육군 중장에 임명되고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조부의 영향으로 아주 어린 시절 군에 입대한 푸케는 이미 1794년, 17세에 최연소 사관후보생으로서 라인 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아셔레벤에서 바이마르 대공의 장교를 지냈다. 1798년에 마리아네 폰 슈배르트와 결혼했으나 1802년 이혼, 1803년 세 자녀를 둔 미망인 카롤리네 필리피네 폰 로호(결혼 전 성은 폰 브리스트, 1773~1831)와 재혼했다. 그녀는 영지를 소유한 폰 브리스트 가문의 상속녀였다. 전 남편인 폰 로호는 그녀와 이혼 수속 중 노름 빚 때문에 자살했다. 카롤리네와 결혼 후 푸케는 베를린과 아내의 영지인 넨하우젠에 거주했다. 1803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마리 루이제 카롤리네 드 라 모테 푸케(1803~1864)가 태어났다. 푸케의 결혼 생활은 평탄했고, 넨하우젠 성은 낭만주의 작가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내 카롤리네 역시 낭만주의 독일 여성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남편과 함께 문학적 명성을 누렸다. 푸케는 처음에는 펠레그린(Pellegrin)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북유럽의 전설, 중세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 낸 그의 초기 작품들은 소재와 서술 기법에서 이미 훗날 그의 작품을 결정하는 모든 요소를 담고 있었다. 1808년부터 1820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푸케는 삶에서 또 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1811년 발표된 ≪운디네≫는 환상적 요소와 동화적 색채를 띤 소설로서 독일 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푸케의 이름을 알리게 했다. 하이네는 푸케가 낭만주의 서사 작가들 중 유일하게 모든 대중을 감동시킨 작품을 썼다고 평했고, 아이헨도르프는 푸케가 대중에게는 낭만주의의 중심인물로 인식된다고 언급했다. 낭만주의 작가인 슐레겔 형제, 장 파울, 에른스트 호프만 역시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푸케의 인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운디네≫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반복되는 기사 이야기에 독자들은 진저리를 냈다. 181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유사한 소재의 글을 계속 발표했다. 그는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보잘것없는 글을 쓰는 작가로 치부되었고, 통속소설 작가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한때 그를 칭찬했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그와 거리를 두었고, 아이헨도르프는 푸케를 “낭만주의의 돈키호테”라고 비꼬았다. ≪운디네≫에 대해서 대단한 찬사를 퍼부었던 하이네도 푸케의 후기 작품에 대해 “짜증스럽다”고 표현했다. 1831년 두 번째 아내 카롤리네가 사망한 뒤, 55세의 푸케는 딸 마리를 돌보던 알베르티네 토데와 결혼했다. 여전히 넨하우젠 성에 거주하던 그는 카롤리네가 첫 번째 결혼해 나은 아들 테오도르에 의해 넨하우젠에서 추방당한 뒤, 할레로 이주해 9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푸케의 젊은 날의 친구이자 훗날 프로이센의 왕이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1841년 푸케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연금을 올려 주었다. 이후 오늘날에는 라인하르트슈트라세가 된 칼슈트라세에서 그는 세 번째 아내인 알베르티네, 아들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그리고 장모와 함께 살았다. 1843년 푸케는 베를린 자택의 계단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사람들이 그를 침대에 눕혔으나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죽음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 1월 21일 아침 푸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만세, 주님이 내 곁에 계신 것만 같다. 그러나 죽음 또한 가까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이 훨씬 더 가까이 계신다.” 그렇게 1843년 1월 23일 낭만주의 작가 푸케는 사망했다. 1월 26일 그는 베를린의 무덤에 안장되었다. 오늘날 푸케는 독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운디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잊혀졌지만, 푸케는 많은 작가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시들은 85명의 작곡가들에 의해 140곡의 노래로 남겨졌다.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도 푸케의 시 중 6편에 곡을 붙였다. 푸케는 세 번 결혼해서 세 자녀를 얻었다. 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첫째 아들 프리드리히는 처음에는 군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작곡가가 되어 몇몇 작품을 남기고 1874년 후손 없이 사망했다. 푸케가 사망하고 6일이 지난 뒤에 태어난 둘째 아들 발데마르는 5명의 아이를 얻었고, 이 자녀들의 후손 중 한 명이 현재 함부르크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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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A. 호프만 (지은이)    정보 더보기
에드거 앨런 포,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발자크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후기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호프만은 1776년 1월 24일 발트해 동남부 연안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되던 해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는 큰아들을 데리고 인스터부르크로 떠났고, 어머니는 막내 호프만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살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를 알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큰형과도 거의 교류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 작품 곳곳에 반영되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가문의 전통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법과 대학에 들어갔으나 법학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음악, 문학, 미술에 몰두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795년 사법 시험을 통과한 후 쾨니히스베르크, 글로가우,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 지방에서 법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침공 후 법관직을 잃고 밤베르크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의 교회와 극장을 옮겨 다니며 음악단장, 연출가, 극작가, 무대 화가로 일했으며 생계를 위해 개인 지도까지 했다. 1814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오페라 「운디네」가 대성공을 거두고, 첫 작품집 『칼로풍의 환상집』으로 ‘천재 작가’라는 명성과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낮에는 법원의 판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창작에 몰두했는데, 이 시기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푸케, 브렌타노 등 당대 낭만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세라피온의 밤’이라는 문학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822년 심각한 병을 얻어 전신 마비 상태에서 「사촌의 구석 창문」을 구술하며 집필 작업을 이어 가던 중 목까지 마비 증세가 왔고, 결국 6월 25일 타계했다. 주요 작품으로 『밤 풍경』, 『악마의 묘약』,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브람빌라 공주』, 『벼룩 대왕』, 『칼로풍의 환상집』, 『세라피온의 형제들』 등이 있고, 작곡가로도 활동하며 기악곡, 성악곡, 오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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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루트비히 티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루드비히 티크는 1773년 5월 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상상력이 풍부한 재능은 유년 시절부터 돋보였다. 1792년 그는 처음에는 할레에서, 그리고 괴팅엔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796년에 비로소 첫 번째 소설 ‘윌리엄 로벨’(William Lovell)이 완성되었다. 이상주의자로 시작했지만 관능적인 삶에 빠진 젊은 영국인의 이야기이다. 1793년 티크는 젊은 작가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와 함께 남부 독일을 유랑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중세 독일 문화의 풍요로움을 발견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티크와 바켄로더는 소설 ‘방랑하는 프란츠 슈테른발트’(Franz Sternbalds Wanderungen)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프란츠 슈테른발트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제자로 예술을 배우고 삶을 경험하고, 마침내 신비한 마리아를 찾아 유럽을 떠돌아다닌다. 1794년까지 티크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독일의 오래된 민담을 각색했다. 또한 1797년에는 죄책감, 근친상간,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인 ‘금발의 에크베르트’(Der blonde Eckbert)와 같은 작품을 썼다. 이 시기에 실험적인 드라마인 ‘왕자 제르비노’(Prinz Zerbino)와 희곡 ‘장화신은 고양이’(Der gestiefelte Kater)도 발표했다. 이 희곡에서 의도적으로 연극적 환상을 파괴하는데 20세기 실험극의 선구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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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힘 폰 아르님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독일 낭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브렌타노와 함께 독일의 민간 전승문학을 집대성한 독일 최초의 민요집 『소년의 마적』은 『그림 동화집』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문헌적 성과로 후대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미완성 역사소설 『왕관을 지키는 사람들』, 『이집트의 이사벨라』, 『할레와 예루살렘』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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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아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경기대학교 유럽어문학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옮긴 책으로는 잉게보르그 바흐만의 《말리나》, 《삼십세》, 《만하탄의 선신》,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미카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뮈렌 왕자》, 《모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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