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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붉은 고양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89824374
· 쪽수 : 375쪽
· 출판일 : 2005-08-31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89824374
· 쪽수 : 375쪽
· 출판일 : 2005-08-31
책 소개
독일문학의 문예사조별 대표 단편소설 10편을 엮어놓은 책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 루이제 린저, 프란츠 카프카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을 비롯해 클라이스트, 티크, 브렌타노, 슈토름, 슈니츨러, 보르헤르트 등 독일문학에 한 획을 그은, 명실 공히 독일 대표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작가 소개
붉은 고양이 - 루이제 린저
빵 - 볼프강 보르헤르트
변신 - 프란츠 카프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아르투어 슈니츨러
선러지기 털 -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임멘 호 - 테오도르 슈토름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 - 클레멘스 브렌타노
금발의 에크베르트 - 루트비히 티크
칠레의 지진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노벨레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자소개
루이제 린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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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소설가인 루이제 린저는 1911년 독일 피츨링에서 태어났다. 뮌헨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재직하였으나 1939년 나치의 억압으로 해직 통보를 받게 된다.
그녀는 지휘자였던 첫 번째 남편과 작곡가였던 두 번째 남편을 통해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게 되었으며, 전문가적 관점으로 음악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윤이상을 만났던 그녀는 자신 역시 반反나치 투쟁으로 투옥되었던 경험으로 윤이상이 가진 아픔을 깊이 공감하며 오랜 친교를 유지했다. 또한 노자, 도교 등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윤이상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윤이상의 음악과 정신의 모든 것이 담긴 이 책이 그녀의 손으로 적힌 건 이 때문이다.
대표작으로 『생의 한 가운데』, 『덕성의 모험』, 『다니엘라』,『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 『완전한 기쁨』, 『고독한 당신을 위하여』, 『미리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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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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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독일 함부르크의 에펜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시를 쓰기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함부르크의 유력 일간지에 시를 발표하고, 졸업 후에는 서점 직원으로 일하면서 연극 수업을 받았다. 배우로 활동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혹독한 전쟁을 체험했다. 군 복무 시절 자해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감옥과 전장을 오가는 가혹한 생활로 인해 병을 얻었다. 1945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에 탈주한 그는 함부르크로 돌아와 극장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죽음을 앞둔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병상에서 집필되었다. 1947년 11월 20일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 생전에 출간된 시집 『가로등, 밤, 별들』과 단편집 『민들레』가 있으며, 사후에 출간된 단편집 『이번 화요일에』와 유고를 함께 묶은 『보르헤르트 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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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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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15일 유대인 후두 전문의 요한 슈니츨러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제 슈니츨러의 아들로 빈 프라터가에서 태어났다. 1879∼1884년 빈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고 1885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친교를 나누면서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간다. 1886년부터 1893년까지 빈의 여러 병원에서 보조 의사로 근무했다. 작품 활동 초기인 1890년부터 1899년까지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빈 모더니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슈니츨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상과 세기말 현상을 비판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부친이 사망한 뒤 전업 작가가 되어 단막극 연작 〈아나톨〉을 비롯해 단편 〈죽음〉(1894), 단막극 〈사랑의 유희〉(1895)를 연이어 발표한다. 1897년에는 열 개의 대화로 구성된 단막 연작 〈윤무〉를 발표하지만 검열로 인해 공연 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어 단편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발표했다. 1899년부터 작품 활동 중기에 해당되는 1921년까지, 슈니츨러는 심리학적 주제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다룬 극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초록 앵무새〉(1899), 소설 《구스틀 소위》(1900)가 이 시기 대표작이다. 1903년 여배우 올가 구스만과 결혼한다. 1908년 첫 장편 《트인 데로 가는 길》을 집필한다. 이 작품에서 빈 사회를 살아가는 유대인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1911년 발표된 유일한 희비극 〈광활한 땅〉은 슈니츨러 극작품 중 공연 측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로 뒤이어 발표된 〈베른하르디 교수〉(1912)는 반유대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5막 희극으로, 검열법에 따라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이혼 이후 슈니츨러는 심리적 고립감과 건강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한동안 세기말 개인의 운명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한 단편들을 포함 소설 집필에 주력한다. 1923년에는 오스트리아 펜(PEN) 클럽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뒤이어 소설 《엘제 양》(1924), 소설 《꿈의 노벨레》(1925)를 연이어 발표한다. 1926년 슈니츨러는 부르크극장의 명예 반지를 받는다. 1928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 《테레제. 여성의 삶의 연대기》를 발표한다. 1931년 10월 21일 빈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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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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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8월 28일 독일 마인강 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부친 요한 카스파르(Johann Kaspar) 괴테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황실 고문관이라는 명예직을 가진 부유한 시민으로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성격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Katharina Elisabeth)는 라틴계 특유의 풍부한 감정과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의 여성으로 어린 아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인형극을 접하게 하여 아들의 예술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괴테는 1765년 10월 부친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1771년 8월 법학석사 학위 시험을 치른 뒤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변호사로 일을 시작하지만 본업보다는 문학에 더 힘을 기울인다. 이 시기 〈무쇠 손 괴츠 폰 베를리힝겐〉(1773)을 발표한다. 이후 3년은 괴테 일생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의 기간이다. 《젊은 베르터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1744)도 이때 발표된다.
1776년 괴테는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되는 것을 시작으로 10년간 여러 분야의 행정 업무를 담당한다. 1782년에 재무상이 되는 한편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로부터 귀족 작위도 받는다. 이 시기 바이마르 궁정의 여관 샤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의 정신적 교류 영향으로 질풍노도기의 과도한 격정에서 벗어나 조화와 중용을 지향함으로써 좀 더 원숙한 문학 세계로 들어선다. 그 밖에 괴테는 지질학, 광물학, 해부학, 식물학 등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한다. 1786년 9월 3일 괴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이마르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탈리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접한 괴테는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중용을 지키며 교양을 갖춘 원숙한 인간상을 절제된 언어와 짜임새 있는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한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별 성과 없이 여러 해를 지내던 괴테는 10년 연하의 실러와 아름다운 우정 관계를 맺는다.
1828년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의 사망과 2년 뒤 아들의 죽음으로 최대 시련을 맞은 괴테는 미완성 작품에 매달림으로써 그 시련을 극복하려고 한다. 〈파우스트〉는 그때까지 인간 정신이 이룩한 모든 것과 예언적으로 이후에 창조될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방대한 스케일, 다양한 운율, 풍부한 상징 등으로 독일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대작이다. 인간의 한평생이라 할 수 있는 6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파우스트〉의 완성과 함께 괴테의 일생도 종결된다. 괴테는 1832년 3월 22일 향년 83세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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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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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서 교육받았다. 1901년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인 카를 페르디난트대학교에 입학해 화학을 공부하다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한때 독문학에 관심을 두고 독문학을 전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 무렵 평생의 벗 막스 브로트를 만나 교우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더욱 키워갔지만 결국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법학 공부를 이어가 1906년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년간 법원에서 법률 시보로 실습하고 보험회사에 입사했다. 대학 시절부터 문학 창작에 뜻을 두고 단편소설과 산문을 집필해왔으나 고된 회사 업무로 글을 쓸 여력이 없을 정도가 되자 1908년 ‘보헤미아왕국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직장을 옮기고, 14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쓰기에 열중했다. 1917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에도 계속 작품을 집필했으며 1922년 병의 증세가 악화해 직장에서 퇴직한 후 1924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는 숨을 거두기 전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유고를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브로트는 카프카의 많은 작품과 일기, 편지 등을 편집, 출판해 카프카의 삶과 문학 세계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주요 작품으로 〈변신〉 〈시골 의사〉 〈단식 광대〉 등 중단편과 장편 《실종자》 《소송》 《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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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슈토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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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서정시 시인이며 단편소설 작가인 테오도어 슈토름은 1817년 9월 14일 독일 북부의 해안도시 후숨에서 법률고문관의 부유한 집안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동안에는 네 살 때 벌써 사설 초등학교에 다니는 등 안락한 나날을 보낸다. 1826년부터 1835년까지 후숨의 인문계 9년제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니는데, 마지막 3학기 동안에는 뤼벡의 신(新)인문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한다. 여기서 시를 쓰고, 고대시를 모방하는 법을 배우고, 처음으로 산문을 써 보기도 한다. 후숨에서는 그저 프리드리히 실러만 알고 그에 머물러 있었는데, 여기 뤼벡에서는 괴테뿐만 아니라 아이헨도르프나 하이네 등 저명한 작가들의 “보다 고귀한” 공기를 호흡하게 되었다고 한다. 1833년, 이 시기 후숨에서 발표된 《에마에게(An Emma)》가 그의 첫 시집이다. 1837년부터는 키일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베를린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한다. 1대학 생활 동안의 여러 가지 경험들은 훗날의 작품 〈임멘 호수〉와 〈대학에서〉 등 여러 단편소설의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테오도어 몸젠, 티코 몸젠 형제와 사귀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의 전설과 동화와 노래 등을 수집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당시의 운문에도 친숙해지며 문학지 《유럽(Europa)》(1840)에 자작시를 발표하며, 시인 뫼리케 등과도 어울려 1843년에 《세 친구의 가요집(Liederbuch dreier Freunde)》을 출판한다. 1842년 법학고시에 합격하나, 시험이 끝난 후 노름으로 많은 빚을 안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1843년 4월 중순에 후숨에서 “볼트센-슈토름(Woldsen-Storm)”이라는 이름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1846년 사촌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나 결혼 1년이 지난 다음 도로테아 옌센과 사랑에 빠진다. 가족들의 압력으로 애인 도로테아가 후숨을 떠나게 되는데, 이 무렵의 슈토름의 연작시 《빨간 장미의 책(Ein Buch der roten Rose)》에 열정적인 시구들이 나타나고, 1855년에 창작된 단편 〈안젤리카〉의 여주인공도 이때의 애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슈토름은 작가라기보다는 법률가였으며, 무엇보다도 변호사와 판사로 일했다. 1848년 덴마크의 지배에 반항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민중 봉기에 참여하기도 하고 친구 테오도어 몸젠의 요청에 따라 이에 대한 보고서도 작성한다. 또 “애국자선협회”의 창립 동조자가 되고, 이에 대해 그 지방 신문에 기고하기도 한다. 1849년에는 덴마크 왕 프리드리히 7세에 대한 공작 신분을 박탈하고 인적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종식하라는 진정서에 서명한다. 그 후로 덴마크 관청이 슈토름의 분파적 성향을 비난하며 하급재판소의 변호사직 인가를 거부했을 때 베를린에서 그를 포츠담의 지방법원에 무보수로 임용하자 그는 이에 동의해, 1853년 포츠담으로 옮겨 그곳에서 근무한다. 이후 1856년 하일리겐슈타트 지방법원 합의부 판사에 임명된다. 과도한 판사 업무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동아리(Singkranzchen)”라는 새로운 합창단을 구성하기도 하고, 단편소설 〈임멘 호수〉의 삽화를 그린 루드비치 피치 등의 친구들도 사귀며, 〈저편 시장(市場)에서(Druben am Markt)〉, 〈대학에서〉, 〈불레만의 집(Bulemanns Haus〉 등의 사실주의적 소설과 창작 동화를 집필하기도 한다. 1864년 독일?덴마크전쟁에서 덴마크가 패하면서 슈토름은 후숨 신분제의회에서 주지사로 선출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음 해 5월에는 부인 콘스탄체가 세상을 떠나고, 상(喪)을 마친 다음 1866년 6월 13일 옛 애인 도로테아 옌센과 조촐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다음 해에 프러시아 행정 개혁의 합병 절차에 따라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방법원 재판관에 임명된다. 이 무렵 〈주정부위원의 아들들(Die Sohne des Senators)〉, 〈이중인간〉 등의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작가 활동도 계속하면서, 1877년부터는 스위스작가연맹의 동료 켈러와 서신교환도 한다. 1880년 5월에 63세의 나이로 조기에 판사직을 정년퇴직하고 하데마르셴으로 이주하여 양로원에 입주한 다음 건강에 해가 될 정도로 긴 여행을 한다.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면서도 마지막 작품 《백마의 기수》를 완성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1888년 7월 4일 하데마르셴에서 질병으로 사망해, 고향 후숨의 성(聖) 유르겐 성당 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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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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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연주의문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간주된다. 1887년에 소설 『선로지기 틸』을 발표한 후 『해뜨기 전』(1889), 『직조공들』(1892) 등 여러 드라마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그린 『직조공들』은 황제 빌헬름 2세의 분노를 샀다. 하우프트만은 19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그의 작품들도 엄격한 검열로 피해를 당했지만 히틀러 정권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하우프트만을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하우프트만이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 많은 긍정적 논평을 달아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우프트만의 죽음 또한 주목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하우프트만이 살고 있던 슐레지엔 지역이 폴란드에 할양되어 모든 독일인이 추방되었으나 하우프트만은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1946년 6월 6일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 그리하여 하우프트만의 시신은 아연관에 안치되어 그의 서재에 보관되었다. 그의 시신은 한 달 이상이 지나서야 특별 열차편으로 독일로 이송되어 독일 북쪽 히덴제라는 섬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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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브렌타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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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후기 낭만파 시인이다. 1778년 에렌브라이트슈타인에서 태어났다. 1798년 예나대학에 유학했으며, 슐레겔 형제 등의 낭만파 살롱에 출입하며 장편소설 <고트비>를 썼다. 낭만파 시인 중에서 가장 풍부한 재능을 지녔고, 기타를 치며 즉흥으로 부른 노래가 그대로 멋진 시가 되었다고 한다. 지은 책으로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 <편력학생 연대기>, <고켈, 힝켈, 가켈라이아>를 비롯한 다수의 동화와 희곡 <폰세 데 레온>, <프라하의 건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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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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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폴란드 국경과 접한 독일의 소도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에서 태어났다. 178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베를린의 위그노파(프랑스의 신교)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서 깊은 군인 집안에서 클라이스트 또한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1799년에 그는 군인의 길을 포기한다. 클라이스트는 프랑스의 근대화, 나폴레옹군의 독일 지배, 프로이센의 개혁 등 “이런 변화무쌍한 시기”에 국가에 대한 의무, 가문과 신분에 의한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인간으로서의 행복, 인생의 목표를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클라이스트는 파혼까지 겪은 후 ‘위기의 작가’가 된다. 1807년 낭만주의자들과 협업한 예술잡지 ≪푀부스≫, 1810년 시사적인 신문 ≪베를린 석간≫의 편집자와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재정난은 가중되어 갔다. 드라마 작가, 단편 작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시도는 모두 실패와 좌절로 이어졌고, 삶의 방향과 목표를 상실한 클라이스트는 1811년 34세라는 나이에 베를린 근교의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과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0년 남짓한 창작 기간에 수편의 드라마와 소설을 썼지만 클라이스트 생전에 무대에 오른 작품은 <깨어진 항아리>뿐이었고 단편도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통해 발표되는 정도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클라이이스트의 작품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그가 남긴 8편의 단편과 8편의 드라마는 오늘날 독일어권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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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루트비히 티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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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티크는 1773년 5월 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상상력이 풍부한 재능은 유년 시절부터 돋보였다. 1792년 그는 처음에는 할레에서, 그리고 괴팅엔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796년에 비로소 첫 번째 소설 ‘윌리엄 로벨’(William Lovell)이 완성되었다. 이상주의자로 시작했지만 관능적인 삶에 빠진 젊은 영국인의 이야기이다.
1793년 티크는 젊은 작가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와 함께 남부 독일을 유랑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중세 독일 문화의 풍요로움을 발견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티크와 바켄로더는 소설 ‘방랑하는 프란츠 슈테른발트’(Franz Sternbalds Wanderungen)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프란츠 슈테른발트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제자로 예술을 배우고 삶을 경험하고, 마침내 신비한 마리아를 찾아 유럽을 떠돌아다닌다.
1794년까지 티크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독일의 오래된 민담을 각색했다. 또한 1797년에는 죄책감, 근친상간,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인 ‘금발의 에크베르트’(Der blonde Eckbert)와 같은 작품을 썼다. 이 시기에 실험적인 드라마인 ‘왕자 제르비노’(Prinz Zerbino)와 희곡 ‘장화신은 고양이’(Der gestiefelte Kater)도 발표했다. 이 희곡에서 의도적으로 연극적 환상을 파괴하는데 20세기 실험극의 선구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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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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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사범대학교 독어교육과와 고려대학교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연구했으며, 독일 뮌헨대학교 객원 교수로 활동했다.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학과장, 신문방송사 주간, 언어교육원장, 평생교육원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이다. 저서로는 『독일단화의 이론과 실제』, 『독일문화의 이해』, 『ARD 방송독일어』, 『독일의 역사와 문화』, 『시사 독일어』, 『문학 속의 삶』, 『나와 신문과 독일문학』, 『볼프강 보르헤르트 문학의 이해』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인류사를 이끈 운명의 순간들』(슈테판 바이크), 『붉은 고양이』(루이제 린저 외), 『괴테 자서전』(괴테),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윤무』(아르투어 슈니츨러), 『톨레도의 유대여인』(프란츠 그릴파르처), 『문 밖에서』(볼프강 보르헤르트), 『죽음』(아르투어 슈니츨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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