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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36471767
· 쪽수 : 436쪽
· 출판일 : 2010-01-08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36471767
· 쪽수 : 436쪽
· 출판일 : 2010-01-08
책 소개
근현대 외국소설 100년의 걸작을 각 어권의 대표 연구자들이 엄선하고 공들여 번역한 창비세계문학. 독일편 <어느 사랑의 실험>은 수록작 17편 중 11편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 소개되는 등 형식과 스타일이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작품 하나하나가 주제와 형식적인 면에서 그 시대마다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흔적을 보여준다.
목차
요한 볼프강 폰 괴테_정직한 법관 / 요한 루트비히 티크 기발한 페르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_주워온 자식 / 요한 페터 헤벨 뜻밖의 재회
후고 폰 호프만스탈_672일째 밤의 동화 / 토마스 만 루이스헨
아르투어 슈니츨러_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 헤르만 헤쎄 짝짓기
프란츠 카프카_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 헤르만 브로흐 바르바라
일제 아이힝어_달나라 이야기 / 하인리히 뵐 광고물 폐기자
알렉산더 클루게_어느 사랑의 실험
마리에 루이제 카슈니츠_제니퍼의 꿈
잉에보르크 바흐만_개 짖는 소리
지크프리트 렌츠_발라톤 호수의 물결
크리스토프 하인_인도로 가는 항로는 없었다
저자소개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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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15일 유대인 후두 전문의 요한 슈니츨러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제 슈니츨러의 아들로 빈 프라터가에서 태어났다. 1879∼1884년 빈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고 1885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친교를 나누면서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간다. 1886년부터 1893년까지 빈의 여러 병원에서 보조 의사로 근무했다. 작품 활동 초기인 1890년부터 1899년까지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빈 모더니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슈니츨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상과 세기말 현상을 비판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부친이 사망한 뒤 전업 작가가 되어 단막극 연작 〈아나톨〉을 비롯해 단편 〈죽음〉(1894), 단막극 〈사랑의 유희〉(1895)를 연이어 발표한다. 1897년에는 열 개의 대화로 구성된 단막 연작 〈윤무〉를 발표하지만 검열로 인해 공연 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어 단편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발표했다. 1899년부터 작품 활동 중기에 해당되는 1921년까지, 슈니츨러는 심리학적 주제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다룬 극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초록 앵무새〉(1899), 소설 《구스틀 소위》(1900)가 이 시기 대표작이다. 1903년 여배우 올가 구스만과 결혼한다. 1908년 첫 장편 《트인 데로 가는 길》을 집필한다. 이 작품에서 빈 사회를 살아가는 유대인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1911년 발표된 유일한 희비극 〈광활한 땅〉은 슈니츨러 극작품 중 공연 측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로 뒤이어 발표된 〈베른하르디 교수〉(1912)는 반유대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5막 희극으로, 검열법에 따라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이혼 이후 슈니츨러는 심리적 고립감과 건강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한동안 세기말 개인의 운명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한 단편들을 포함 소설 집필에 주력한다. 1923년에는 오스트리아 펜(PEN) 클럽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뒤이어 소설 《엘제 양》(1924), 소설 《꿈의 노벨레》(1925)를 연이어 발표한다. 1926년 슈니츨러는 부르크극장의 명예 반지를 받는다. 1928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 《테레제. 여성의 삶의 연대기》를 발표한다. 1931년 10월 21일 빈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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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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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8월 28일 독일 마인강 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부친 요한 카스파르(Johann Kaspar) 괴테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황실 고문관이라는 명예직을 가진 부유한 시민으로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성격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Katharina Elisabeth)는 라틴계 특유의 풍부한 감정과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의 여성으로 어린 아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인형극을 접하게 하여 아들의 예술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괴테는 1765년 10월 부친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1771년 8월 법학석사 학위 시험을 치른 뒤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변호사로 일을 시작하지만 본업보다는 문학에 더 힘을 기울인다. 이 시기 〈무쇠 손 괴츠 폰 베를리힝겐〉(1773)을 발표한다. 이후 3년은 괴테 일생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의 기간이다. 《젊은 베르터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1744)도 이때 발표된다.
1776년 괴테는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되는 것을 시작으로 10년간 여러 분야의 행정 업무를 담당한다. 1782년에 재무상이 되는 한편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로부터 귀족 작위도 받는다. 이 시기 바이마르 궁정의 여관 샤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의 정신적 교류 영향으로 질풍노도기의 과도한 격정에서 벗어나 조화와 중용을 지향함으로써 좀 더 원숙한 문학 세계로 들어선다. 그 밖에 괴테는 지질학, 광물학, 해부학, 식물학 등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한다. 1786년 9월 3일 괴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이마르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탈리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접한 괴테는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중용을 지키며 교양을 갖춘 원숙한 인간상을 절제된 언어와 짜임새 있는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한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별 성과 없이 여러 해를 지내던 괴테는 10년 연하의 실러와 아름다운 우정 관계를 맺는다.
1828년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의 사망과 2년 뒤 아들의 죽음으로 최대 시련을 맞은 괴테는 미완성 작품에 매달림으로써 그 시련을 극복하려고 한다. 〈파우스트〉는 그때까지 인간 정신이 이룩한 모든 것과 예언적으로 이후에 창조될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방대한 스케일, 다양한 운율, 풍부한 상징 등으로 독일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대작이다. 인간의 한평생이라 할 수 있는 6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파우스트〉의 완성과 함께 괴테의 일생도 종결된다. 괴테는 1832년 3월 22일 향년 83세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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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페터 헤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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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서남부 바덴 지방에서 태어났다. 신학을 공부하고 개신교의 목사가 되었다. 서른이 넘어 김나지움의 교사가 되어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교과도 가르쳤다. 나중에는 교장을 역임하였다. 목사로서는 바덴공국의 신교 최고직에 올랐다. 고등학교 재임시에 당시 성경을 제외하고서는 유일한 서민들의 읽을거리기도 했던 달력을 제작하면서 거기에 자신이 쓴 글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들이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나중에 그 이야기들을 모아《 라인 지방 가정의 벗의 보석 상자》라는 책으로 발표하였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독일의 남녀노소가 애독하는 책이 되었고, 그 이야기 형식은 달력이야기라는 독특한 문학 장르가 되었다. 헤벨은 이 책과 자기가 평생 살았던 지방의 사투리로 쓴 한 권의 시집만으로 독일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작가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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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보르크 바흐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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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방송극 작가, 에세이스트. 1926년 오스트리아 캐른텐 지방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때부터 오스트리아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 시와 산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빈, 그라츠, 인스부르크 등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스물 네 살 때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빈의 방송국에서 3년간 라디오 방송을 위한 수많은 각색을 했으며, 1952년 그룹 낭독회에서 작품이 처음으로 낭독되었다. 1953년 처녀시집 <유예된 시간>으로 '47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이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이때부터는 주로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며 독일 신문의 로마 통신원,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작가 등으로 일했고, '루트 켈러'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뮌헨, 쮜리히, 미국에서도 체류했고, 1966년 이후 로마에 완전히 정착했다. 서정시인이자 소설가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브레멘 시 문학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독일비평가협회상 수상작인 <삼십세>, 그리고 <유예된 시간>, <대웅좌의 부름>, <말리나> 등이 있다.
1973년 9월 26일 로마에 있는 그녀의 집에 화재가 발생, 중화상을 입었고 10월 17일 병원에서 숨졌다. 직접적인 사인은 중독 약물의 투입 중지였다. 그녀는 평소 강도 높은 진통 성분의 약물에 중독돼 있었는데, 병원에서는 이를 몰랐기 때문에 해당 진통제를 투여하지 않았고,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 되었다. 화재 당시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발견되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약물로 인해 불이 난 것을 일찍 감지하지 못했으리라는 추정과 자살 가능성 등 여러 의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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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하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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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대학과 훔볼트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공부하고,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조립공, 웨이터, 서점 점원, 베를린 민중극장(Volksbuhne)의 조연출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가다, 1971년부터 연출가 베노 베손(Benno Besson) 밑에서 민중극장의 드라마트루크(희곡 전문가)로, 그리고 뒤이어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전속작가로 활동했다. 전속작가직에서 물러난 후, 뷔히너의 사실주의 전통을 잇는 하인의 연극 미학과 미묘하고 까다로운 소재들은 동독의 문화 정책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이후 번역, 방송, 비평 등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그러다 1982년 중편소설 〈낯선 연인(Der fremde Freund)〉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동독과 서독을 함께 열광시켰다. 동독에서 1982년에 출판된 후, 1983년 서독에서 ‘용의 피(Drachenblut)’로 제목을 바꿔 발행되었고, 이후 2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이어 《호른의 죽음》(1985), 《탱고 연주자(Der Tangospieler)》(1989) 등을 발표하며 문명을 떨쳤고, 우베욘손상, 슈테판하임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말 오랫동안 저평가됐던 하인은 이 세 소설과 SED정치국을 모델로 한 희극 〈원탁의 기사(Die Ritter der Tafelrunde)〉(1989)로 동·서독의 성공적인 작가로 다시금 부상한다. 이 드라마는 1989∼1890년에 독일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희곡, 소설, 수필 등 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였으며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전 독일 펜클럽의 초대 의장을 지냈다. 현재 하벨베르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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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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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평론가. 독일 북부의 뤼베크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기말의 암울한 데카당스 분위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일찍부터 문학,?예술, 철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189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보험회사에서 잠시 근무했고, 뮌헨으로 이사 가 1933년까지 살았다. 이때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했고,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 등에 심취했다. 1898년 단편집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발표하고, 1901년 《부덴브로크가》를 출간하여 작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어 1903년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등을 집필한다. 1905년에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그해에 장녀 에리카 만을 얻는다. 1911년에는 휴양지에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듣고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0월에 600쪽이 넘는 방대한 논문집 《비정치적인 사람의 관찰》을 완성하는데, 여기서 그는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경향에서 멀어져 나중에는 민주주의와 시민계급을 옹호했고, 이러한 세계관이 반영된 대작 《마의 산》을 1924년 발표, 소설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1933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이라는 제목으로 국외 강연 여행 도중 히틀러의 집권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귀국을 포기한다. 이후 스위스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을 집필하여 1943년에 4부작을 완성한다. 1936년에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1938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는데, 여러 강연과 연설로 바쁜 와중에도 1947년 음악과 독일에 관한 소설이라 할 만한 《파우스트 박사》를 내놓는다. 1952년 미국에서 스위스로 거처를 옮기고 3년 후인 1955년 취리히에서 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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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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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서 교육받았다. 1901년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인 카를 페르디난트대학교에 입학해 화학을 공부하다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한때 독문학에 관심을 두고 독문학을 전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 무렵 평생의 벗 막스 브로트를 만나 교우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더욱 키워갔지만 결국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법학 공부를 이어가 1906년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년간 법원에서 법률 시보로 실습하고 보험회사에 입사했다. 대학 시절부터 문학 창작에 뜻을 두고 단편소설과 산문을 집필해왔으나 고된 회사 업무로 글을 쓸 여력이 없을 정도가 되자 1908년 ‘보헤미아왕국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직장을 옮기고, 14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쓰기에 열중했다. 1917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에도 계속 작품을 집필했으며 1922년 병의 증세가 악화해 직장에서 퇴직한 후 1924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는 숨을 거두기 전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유고를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브로트는 카프카의 많은 작품과 일기, 편지 등을 편집, 출판해 카프카의 삶과 문학 세계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주요 작품으로 〈변신〉 〈시골 의사〉 〈단식 광대〉 등 중단편과 장편 《실종자》 《소송》 《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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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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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예를 가업으로 하는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1917년 쾰른에서 태어났다.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의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전쟁 중에는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 생활을 하기도 하고 꾀병과 서류 조작으로 탈영을 하기도 했다. “무의미한 전쟁을 위해서 결코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전후, 귀향해서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년 첫 소설 ≪열차는 정확했다≫를 출간하고 1953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후부터 독일 사회의 불균형적인 발전과 팽배해진 물질주의로 인한 도덕성의 결여에 대해 지적하고,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뵐이 보기에 독일 가톨릭교회는 정부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에 순응하고 동조함으로써 독일에서 그 재정 기반을 확보해 갔기 때문이다. 특히 1959년에 발표한 ≪9시 반의 당구≫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망각하고 재무장을 논하며 오로지 이윤 추구와 소비 조장만으로 치닫는 독일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적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한 무고한 여성이 언론의 횡포에 의해 사회로부터 매장되어 가는 과정을 담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발표하고, 1979년에는 환경 문제를 다룬 소설 ≪신변 보호≫를 발표했다.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을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실천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후 ‘쾰른 문학상’은 ‘하인리히 뵐 문학상’으로 개칭되었고, 쾰른 루트비히 박물관의 광장도 그의 이름을 땄으며, 독일의 열세 개 학교에는 하인리히 뵐의 이름이 붙었다.1967년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한 그는, 1971년 독일인으로는 최초로 국제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미 독일 국내에서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는 데 거침이 없었던 그는 국제펜클럽 회장이 된 후 박해받고 있는 여러 나라의 작가들을 돕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현실적으로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항상 사회에서 소외받고 억압당하는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더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현재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독일 작가의 하나로 꼽힌다.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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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브로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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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실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섬유 공장을 운영했는데, 처음 브로흐는 뮐하우젠에서 섬유 공학을 공부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섬유 공장의 사장이 된다. 하지만 가업을 포기하고 1928년부터 수학과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910년부터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1931년 첫 번째 작품인 <몽유병자들>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독일 나치스가 오스트리아 파시시트 정권을 병합했을 때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무혐의로 풀려난 뒤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다. 1950년 예일 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지만, 1년 후인 1951년 유작인 <유혹자들>을 완성하지 못한 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20세기 초 유럽의 선구적인 작가들을 논할 때, 브로흐는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로베르트 무질 등과 함께 이야기된다. 이 작가들은 현대 소설을 혁신하고 소설 장르를 지식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특히 브로흐는 예술 작품을 아인슈타인 이후의 물리학 이론에 비견할 만한 지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야심 찬 시도를 했다. 브로흐의 대표 장편소설인 <몽유병자들>과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이러한 시도의 산물이다.
그밖에 주요 작품 및 저서로는 <미지의 크기>(1933), <제임스 조이스와 현재>(1936), <베르길리우스의 죽음>(1945), <죄 없는 사람들>(1950), 사후 출간된 <호프만슈탈과 그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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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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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는 목사였고, 어머니 역시 독실한 신학자 가문 출신이라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신학교의 속박된 생활을 못 견디고 뛰쳐나와 한때 자살을 시도했다. 시인이 되기를 꿈꾼 뒤 시계 공장에서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며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1895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해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출간했다.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출간하여 문학적 지위를 얻었다. 그해에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며, 스위스로 이주해 시작에 몰두했다. 그 후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아내의 정신병, 헤세 자신의 신병 등 가정적 위기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의 광적인 폭정에 저항하는 등 파란 많은 세월을 겪었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칼브에서 태어남.
1881년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함.
1890년 라틴 어 학교에 입학함.
1891년 어려운 주州 시험을 통과하고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감.
1893년 칸슈타르 고교를 중퇴함.
1895년 서점 견습 점원이 됨.
1899년 처녀시집 《낭만적인 노래(Romantische Lieder)》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을 발간함.
1901년 시문집 《헤르만 라우셔(Hermann Lauscher)》를 발간해 시인 부세의 주목을 받음.
1902년 《시집(Gedichte)》을 어머니에게 헌정했으나, 어머니는 출판 직전에 별세.
1904년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됨. 9세 연상인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함.
1906년 제2의 장편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를 발표함.
1907년 소설집 《이 세상 이야기(Diesseits)》를 발간함.
1908년 《이웃 사람(Nachbarn)》을 발간함.
1910년 《게르트루트(Gertrud)》를 발간. 방랑벽이 심한 그와 피아니스트인 아내와의 불화로 인도 지방으로 여행함. 귀국 후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함.
1911년 시집 《도상(途上, Unterwegs)》을 발간함.
1912년 《우회로(迂廻路, Umwege)》를 발간함.
1913년 〈로스할데(Roßhalde)〉를 씀. 이 작품에 그려진 예술가의 결혼 생활의 파국은 마침내 헤세 자신의 현실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반전주의자로 지목받아 국적을 스위스로 옮겼으며, 같은 입장에 있던 R. 롤랑과 친교를 맺음.
1915년 서정적인 방랑자의 이야기 《크눌프(Knulp)》와 시집 《고독자의 음악(Musik des Einsamen)》을 발간. 전쟁의 체험과 정신병이 악화된 아내와의 이별 등은 헤세의 작품 경향을 일변시켰음.
1919년 정신 분석 연구로 자기 탐구의 길을 개척한 대표작인 《데미안(Demian)》을 발간함.
1922년 《싯다르타(Siddhartha)》와 〈내면에의 길(Weg nach Innen)〉에서 불교적 해탈의 비밀을 추구하였음.
1927년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를 발표. 이 작품은 내외의 분열과 고뇌를 그린 《데미안》과 일관되어 있음.
1928년 에세이집 《관찰(Betrachtungen)》을 발간함.
1929년 시집 《밤의 위안(Trost der Nacht)》을 발간함.
1930년 스위스에 있으면서 《지(知)와 사랑(Narziss und Goldmund)》을 발표. 이 작품은 신학자로서 지성의 세계에 사는 나르치스와, 여성을 알고 애욕에 눈이 어두워진 골드문트와의 우정의 역사를 다룬 것임.
1933년 소설집 《작은 세계(Kleine Welt)》를 발간함.
1942년 《시집(Die Gedichte)》을 발간함.
1943년 20세기의 문명의 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장편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를 발표함.
1945년 시선집 《꽃 피는 가지(Der Blutenzweig)》를 발간함.
1946년 괴테상과 노벨문학상 수상. 《전쟁과 평화(Krieg und Frieden)》를 발간함.
1951년 《만년의 산문(Spate)》을 발간함.
1954년 《헤세와 로망 롤랑의 왕복 서한》을 발간함.
1955년 《악마를 부름(Beschworungen)》을 발간함.
1962년 8월 9일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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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 폰 호프만스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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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1929.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운문극 <어제>를 발표하여 조숙한 천재성을 내보였다. 로리스라는 필명으로 시 <이른 봄>과 운문극 <바보와 죽음>을 쓴 그는 1903년 막스 라인하르트와 만나면서 희곡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하여 <엘렉트라>에서 고전극의 번안·개작을 시도하였고, <예더만>에서는 중세의 신비극을 현대에 소생시켰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와 '장미의 기사' 대본을 썼다.
만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트리아의 붕괴에 충격을 받아 유럽, 특히 독일의 문화유산의 보전과 검증문제로 고심하면서 <독일어의 가치와 영예>를 집필하기도 했다. 산문극 <탑>은 오스트리아제국 붕괴 후에 쓴 비극이다. 그밖에도 우화소설 <그림자 없는 여인>, 미완소설 <앙드레아스> 등을 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1920년부터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만들었다. 55세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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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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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폴란드 국경과 접한 독일의 소도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에서 태어났다. 178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베를린의 위그노파(프랑스의 신교)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서 깊은 군인 집안에서 클라이스트 또한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1799년에 그는 군인의 길을 포기한다. 클라이스트는 프랑스의 근대화, 나폴레옹군의 독일 지배, 프로이센의 개혁 등 “이런 변화무쌍한 시기”에 국가에 대한 의무, 가문과 신분에 의한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인간으로서의 행복, 인생의 목표를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클라이스트는 파혼까지 겪은 후 ‘위기의 작가’가 된다. 1807년 낭만주의자들과 협업한 예술잡지 ≪푀부스≫, 1810년 시사적인 신문 ≪베를린 석간≫의 편집자와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재정난은 가중되어 갔다. 드라마 작가, 단편 작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시도는 모두 실패와 좌절로 이어졌고, 삶의 방향과 목표를 상실한 클라이스트는 1811년 34세라는 나이에 베를린 근교의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과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0년 남짓한 창작 기간에 수편의 드라마와 소설을 썼지만 클라이스트 생전에 무대에 오른 작품은 <깨어진 항아리>뿐이었고 단편도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통해 발표되는 정도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클라이이스트의 작품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그가 남긴 8편의 단편과 8편의 드라마는 오늘날 독일어권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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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루트비히 티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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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티크는 1773년 5월 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상상력이 풍부한 재능은 유년 시절부터 돋보였다. 1792년 그는 처음에는 할레에서, 그리고 괴팅엔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796년에 비로소 첫 번째 소설 ‘윌리엄 로벨’(William Lovell)이 완성되었다. 이상주의자로 시작했지만 관능적인 삶에 빠진 젊은 영국인의 이야기이다.
1793년 티크는 젊은 작가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와 함께 남부 독일을 유랑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중세 독일 문화의 풍요로움을 발견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티크와 바켄로더는 소설 ‘방랑하는 프란츠 슈테른발트’(Franz Sternbalds Wanderungen)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프란츠 슈테른발트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제자로 예술을 배우고 삶을 경험하고, 마침내 신비한 마리아를 찾아 유럽을 떠돌아다닌다.
1794년까지 티크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독일의 오래된 민담을 각색했다. 또한 1797년에는 죄책감, 근친상간,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인 ‘금발의 에크베르트’(Der blonde Eckbert)와 같은 작품을 썼다. 이 시기에 실험적인 드라마인 ‘왕자 제르비노’(Prinz Zerbino)와 희곡 ‘장화신은 고양이’(Der gestiefelte Kater)도 발표했다. 이 희곡에서 의도적으로 연극적 환상을 파괴하는데 20세기 실험극의 선구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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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클루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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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문화비평가, 사회학자, 법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로 분야를 넘나들며 전 방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알렉산더 클루게는 1932년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할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세 살이 되던 1945년 4월 연합군이 할버슈타트를 폭격하여 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된다. 그즈음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클루게는 어머니를 따라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이때의 경험이 평생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되는데, 특히 종전을 앞두고 벌어졌던 폭격이 안긴 충격은 이 책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 후로도 클루게의 다양한 예술 작업에서 변주된 형태로 나타난다.
마르부르크 대학과 프랑크부르트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 종교음악을 공부했으며, 1956년에는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1958년에는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법률 자문으로 일하면서 아도르노와 친분을 쌓았고, 그의 소개로 프리츠 랑을 만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2년 동료 감독들과 함께 ‘오버하우젠 선언’을 발표하며 1960~70년대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다. 1987년에는 텔레비전 제작사 dctp를 설립했고 지금까지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력서들』 『감정의 연대기』 『공론장과 경험』(공저) 『역사와 고집』(공저) 등이, 영화로 <어제와의 이별> <서커스단의 예술가들> <이데올로기적 고대로부터 온 소식: 마르크스-에이젠슈테인-자본> 등이 있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아도르노 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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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프리트 렌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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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북부 독일의 마주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 다니던 17세 때 2차대전에 징집되어 해군으로 참전했으나 패망해가는 독일군의 실상에 환멸을 느끼고 탈영을 감행하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서독으로 귀환하여 함부르크 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 문학을 공부하고 『디벨트』지의 문화.정치부 기자를 거쳐 문예란 책임 편집위원을 지냈다. 1951년에 첫 장편소설 『창공의 보라매』로 작가적 명성을 얻었으며, 1968년에 발표한 『독일어 시간』은 출간되자마자 독일 출판계를 뒤흔들었다.
렌츠는 비단 소설뿐 아니라 희곡과 방송극 영역에서도 문학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레싱 문학상, 브레멘 문학상,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상, 동독 문학상, 게오르크 마켄젠 문학상, 괴테 상, 노니노 상, 레프 코펠레프 상, 황금깃털 명예상 등을 받았다. 2014년 10월 향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으로는 『독일어 시간』을 비롯해 『침묵의 시간』, 『아르네가 남긴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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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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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괴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냈고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2025년 정년 퇴임해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일 고전주의』(연세대출판문화원, 2016), 『괴테가 탐사한 근대』(창비, 2014), 『독일명작의 이해』(공저, 서울대출판문화원, 2014) 등이 있고, 번역서로 『계몽이란 무엇인가』(이마누엘 칸트 외, 도서출판 길, 2020), 『벌거벗은 진리』(한스 블루멘베르크, 도서출판 길, 2023), 『서사의 단순 형식들』(안드레 욜레스, 서울대출판문화원, 2024), 『한권으로 읽는 문학이론: 소쉬르부터 버틀러까지』(올리버 지몬스, 창비, 2020), 『진리와 방법』(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공역, 문학동네, 2012), 『루카치 미학』(게오르크 루카치, 공역, 미술문화, 2000~2004) 등의 이론서와, 『정신병동 수기』(크리스티네 라반트, 문학과지성사, 2025),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독일 대표시선』(라이너 마리아 릴케 외, 창비, 2023), 『변신·단식광대』(프란츠 카프카, 공역, 창비, 2020), 『천사는 침묵했다』(하인리히 뵐, 창비, 2019),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토마스 만, 창비, 2017), 『세상의 끝』(로베르트 발저, 문학판, 2017), 『젊은 베르터의 고뇌』(요한 볼프강 폰 괴테, 창비, 2012), 『어느 사랑의 실험』(알렉산더 클루게 외, 창비, 2010), 『파우스트 박사』(토마스 만, 공역, 민음사, 2010), 『나르치스와 골드문트』(헤르만 헤세, 민음사, 2002) 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펴낸 책으로는 『김남주 시전집』(공편, 창비, 2014), 『김남주 문학의 세계』(공편, 창비, 2014), 『살아 있는 김수영』(공편, 창비, 2005), 『황석영 문학의 세계』(공편, 창비, 200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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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깐따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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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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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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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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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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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창비세계문학:독일편]단편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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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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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어느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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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8)
([마이리뷰]어느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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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
★★★★☆(8)
([마이리뷰]실험대상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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