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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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1493.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청한淸寒),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반궁(泮宮) 북쪽의 초가집에서 부친 김일성(金日省)과 모친 울진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9년(세종 21), 5세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으로 찾아와 김시습의 시재(詩才)를 확인하였고, 이후 조정의 고관들이 김시습을 보기 위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김시습이 ‘오세신동’으로 불린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1443년(세종 25), 9세 무렵 세종이 승정원 승지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 그 재능을 확인케 했는데, 김시습은 박이창 면전에서 시구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세종은 박이창을 통해 김시습에게 금포(錦袍: 비단 도포)를 하사하고 ‘훗날 이 아이를 크게 쓰겠다’는 말을 전한다. 1455년(단종 3, 세조 1),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3일을 나오지 않다가 홀연 통곡하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 후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가 달아났다. 이후 삭발한 후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였다. 1463년(세조 9), 29세 때,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우거하였는데, 이후 1467년경,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것으로 보인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환속했지만, 성종이 계비(繼妃) 윤씨를 폐비(廢妃)하고 사사(賜死)하는 사건을 보고 2년 만에 다시 승려의 복장을 하고 관동으로 향했다. 1493년(성종 24), 59세 때 「자사진찬」(自寫眞贊)을 짓고, 곧바로 이 해 2월,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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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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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왕 때 학자. 자는 총지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 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능하였으며 신라말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꼽혔다. 향찰을 집대성하고 정리했으며,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설총의 유일한 글인 '화왕계'는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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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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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예동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사서연역회 편집위원과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을 역임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저서로 『아계선생약전』, 『윤봉길의사약전』, 『사서삼경입문』, 『논어해설』, 『양명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으며, 역서로 『동의수세보원』, 『명심보감』, 『공자가어』, 『삼국유사』, 『연려실기술』, 『양반전』, 『당의통략』, 『연암선집』, 『효경』, 『순오지』, 『천자문』, 『부모은중경』, 『목련경』, 『오륜행실도』, 『동국붕당원류』, 『주역』, 『관혼상제』, 『격몽요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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