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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4951194
· 쪽수 : 223쪽
· 출판일 : 2018-08-10
책 소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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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지하철에 불이 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기(火氣)와 연기에 호흡기가 상했고, 수십 명이 질식해 죽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은 불길에 재가 되었다. 노인의 스물여덟 난 딸도 죽었다. 아니, 죽었을 것이라 했다. 시체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아직 죽은 것은 아니던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딸 이름은 지금 실종자 명단에 올라 있다. 노인은 텔레비전 뉴스 속보를 보고 딸의 변고를 의심했고 휴대전화로 안부를 확인하고자 했다. 딸은 응답하지 않았다. 딸의 하루 행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노인으로선 숨이 넘어가도록 통탄스럽다. 그 시각에 딸이 그 지하철에 있었을 게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아니길 바랐지만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태라니. 그런 처지에 있다니.
사고대책본부 전화도 불통이었다.
딸의 휴대전화 번호를 수십 번 누르던 노인은 사고 장소로 뛰어간다.
지하도 입구는 아수라장.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통제하는 사람들의 몸싸움 터.
사고가 난 지 벌써 10시간이 지났다. 참상의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노인의 몸도 통제하는 사람들 몸에 제지당한다. 막무가내로 돌진하던 노인의 몸이 통제하는 사람들 발 앞에서 갑자기 무너진다. 정신을 놓은 것이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에 옮기려는데 정신이 돌아온다. 정신을 찾은 순간, 노인 입에서 나온 말.
- 잊어버리는 약 있으면 좀 주시오.
늘 그러했듯 딸은 아침 8시에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까지 노인이 태워주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딸을 태워서 지하철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내려주었다. 휴일이 아닌 아침마다 볼 수 있는 부녀의 일상이었다.
딸은 아직도 마냥 어리고 어여쁘기만 한 스물여덟.
남들은 시집보낼 나이가 되었다고, 다 컸다고 말하지만, 노인에겐 아니었다. 그 여리고 고운 손과 병아리 같은 피부와 구슬이 구르는 예쁜 목소리 어디에 어른의 자취가 있다는 말인지. 벌써 시집이라니.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좀 더 곁에 두어야 했다. 딸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함께 하는 일도 노인한테 큰 기쁨이었다.
***
늦둥이 딸, 미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땐 걱정부터 앞섰다. 부부의 나이가 쉰에 가까웠으니까.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새삼스러웠지만 아내의 배가 불러올수록 걱정만큼 기대도 커졌다. 첫째를 가졌을 때 마음과 분명 달랐다. 그러나 처음엔 달라진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하루하루 삼가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태교는 당신이 하나봐요’ 하고 웃었을 때 노인은 웃지 못했다. 맏이인, 미륵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륵을 가졌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태교란 말을 듣는 순간 노인의 기억이 아득한 과거로 달려갔다. 미륵이 태어났던 날이 떠오르긴 했다. 강보에 싸인 모습을 들여다보던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그랬다. 미륵은 태어나던 날 비로소 노인의 아들이 되었다. 아내 배속에 깃들었던 열 달은 노인 마음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내 말이 거짓은 아닌 것이다. 아버지도 태교를 해야 한다면, 미륵한테 아버지 태교는 없었다.
아내가 웃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미륵이 대학생이 되도록 둘째 소식은 없었다.
부부한테 아무런 문제가 없고 피임도 하지 않았지만 소식은 없었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지도 않았고 애타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선 부부 생각이 같았다.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냥 삼신할미께 맡겨 두자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포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렀고 누가 봐도 가망 없을 나이가 되었으니까. 삼신할미는 부부를 잊었고 부부도 삼신할미를 잊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신할미가 다시 부부를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처음엔 아내 몸에 큰 병이 생긴 줄 알았다.
의사 앞에 앉아있었던 그 짧은 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결혼을 하고 난 뒤로 그렇게 긴장했던 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기 소식을 듣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안도와 허탈과 신기함과 걱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장식한 감정은 기쁨과 기대였다. 사실 듣는 순간 웃었다. 복잡한 감정의 변화는 웃음 뒤에 눌려 드러나지도 않았다.
미나는 그렇게 왔다.
어디서 그런 보물이 왔는지 날마다 고마웠다. 처음 가진 자식이 아니었으니 처음 겪어보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달랐다. 자라는 걸 지켜보는 일이 새삼스럽고 행복했다. 미나는 귀했고 귀한 자식을 보살펴줄 수 있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랬다. 딸의 탄생은 노인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칼 퇴근은 기본이고 퇴근해서 잠잘 때까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 그를 자식한테 그토록 집중하게 했을까. 분명 맏이를 키울 땐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변했다. 너무도 큰 변화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변화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주위에서 하는 소리가 노인의 행동에 대한 답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늦게 얻은 자식이라 더 예쁜 거라고. 그러나 의식하지도 못하는 변화의 이유 따위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맹목의 사랑은 시간과 함께 달려갔다.
딸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노인은 이미 퇴직자였다. 퇴직 후 남아도는 더 많은 시간도 몽땅 딸의 일정에 맞추었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등하교 시간에 맞추어 밥상을 차렸다. 딸이 직장을 잡았을 때도 일상은 변치 않았다.
그러니 딸의 행적을 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까맣게 몰랐다. 정작 딸이 떠나는 시간은 몰랐다. 미나는 이미 10시간 전에 이승을 떠난 것이다. 노인은 그 시간에 시장에 가서 귤을 샀다. 그리고 집에 와서 편안하게 귤을 먹고 있었다. 딸이 화염에 휩싸여 아버질 부르고 있던 시간에 귤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미나는 귤을 좋아했다. 집에 돌아오면 좋아하겠지, 하며 귤 상자를 보며 흐뭇해했다.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면 그것도 모르고 문자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퇴근길, 미나는 지하철을 타면 문자를 보냈다. ‘미나’라고. 그 문자는 부녀 사이의 약속이었다. 지하철을 탔다는. 기다리던 문자를 확인한 노인은 신나게 자전거를 몰아 지하철역으로 달려갔고 언제나 먼저 도착해 딸을 기다렸다.
***
- 미나야─ 대답해─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 있던 노인이 갑자기 놀란 듯 주머니를 뒤진다. 주머니에서 꺼내 든 휴대전화. 노인은 휴대전화를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기도하듯 번호를 누르고 기대에 찬 얼굴로 휴대전화를 귀로 가져간다. 받을 리가 없다. 노인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나 싶은 순간, 전화를 부여잡고 울부짖는다.
- 미나야─ 이 자식아─ 대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