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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6550920
· 쪽수 : 427쪽
책 소개
목차
책을 내며 —5
제1부
백무산 : 시간을 혁명하다 —15
육봉수 : 희망 없음을 희망 있음으로 —41
황규관 : 어둠에 보내는 찬사 —59
김정환 : 세계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는 시 —81
송경동 : 삶은 부활해야 한다 —109
박영근 : 행려의 시, 결핍의 시, 흰 빛의 시 —130
제2부
칠곡 할매들 : 시 안 쓰는 시인들 —161
권선희 :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축제와 제의로서의 말 —188
이명희 : 모호성과 단순성의 공존으로서의 사랑 —214
이민숙 : 타인의 얼굴과 생명, 그 소소한 그물 —239
이 섬 : 아줌마들의 시인공화국을 꿈꾸다 —263
제3부
정희성 :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모두 시인 되기 —289
이정록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목록들이 전부 시였다 —317
이시영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보아 —346
안상학 : 처음인 양 재생되는 오래된 사랑 —371
도종환 : 다시 길 위에서 —390
김민기 : 우리 시대의 가객, 김민기의 노래에 부쳐 —413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문학(literature)’의 어원은 세계를 읽고 다시 또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만이 텍스트인가? 아니다. 사람들의 몸뚱이와 대지와 물과 우주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텍스트다. 어디에다 무엇으로 쓸 것인가? 종이와 컴퓨터 속에? 이 기록들만을 문학이라 부른다면,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을 빼면 4%밖에 안 되는 원자가 우주의 모든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안 보여도 존재하는, 말 안 하고 글 안 써도 실재하는 “전체가 기억인” 내 몸, “시간을 담아내는 호수”에 우리는 써야 한다. 내 몸의 혁명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생성하는 종이다. 그것은 바로 시간 혁명이며, 광야의 길과 인간의 시간을 결합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좁은 방에 갇힌 ‘나’만의 속삭임을 지나, 저 넓은 지평선을 향해 허리를 펴고 두 다리를 대지에 굳건히 디디고 있는, 혁명의 언어는 기쁨과 화해와 생명과 야생의 노래이기도 하겠다. 저 평등한 수평선을
가득 채운 출렁거리는 생명들의 말, 물속의 말, 온 세계에 촛불처럼 타오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두운 숲속의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 그리고 그들이 시시각각 새기고 있는 시.
―「백무산 : 시간을 혁명하다」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는 것만 본다. 그림자 형태로라도 존재하지 않거나, 경험이 부재하거나 사유해본 적 없는 것은 모두 비밀 속에 갇힌 난해 부호다. 잘난 척인가? 아니다. 진실성이다. 고도의 핍진함과 사실성이 난해라는 이름으로 당대에 죄 없이 배척당하고 미움 받는 이유는, 사방팔방 돌아다녀도 속살은 못 만지고 돌아오는 독자 혹은 타자의 게으름과 안이함 때문이다. 희미한 한 점의 어떤 물질화된 사유가 언어를 통해 육박해오면 그 점은 점점 선이 되고 도형이 된다. ‘환영’ 같지만 그 속엔 “깊이의 실제”가 있다. “읽으면 그대 속으로 그대가 있는” 이 속으로, 위로와 편안함과 달콤함과 행복만이 문학과 예술과 삶의 존재 이유라면 구태여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화석과 먼지와 짐승과 인간과 예술이 한 몸, 한 점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하나를 잠시 살아보다 가는 것이 생이라면 이 “빛, 색, 선, 우주의 공중파” 속, 바늘구멍만 한 점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나. “읽으면 그대 속으로 그대가 있는/ 속, 환영의 깊이의 실제인” 점, 뿐 속으로.(「점, 뿐, 속」)
―「김정환 : 세계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는 시」
노동자들 언저리에서 청춘을 다 보냈지만 그는 촌놈이었던 겁니다. 삶이 가파른 빙벽만큼이나 고독하고 아찔하고 춥고 외로웠을 때 그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새로운 해방의 원초적 모습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만 하고 살기에도 버거운데, 그즈음 공장 안에선 노조를 깨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자본가의 사주에 의한 노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괴롭고 아픈 건, 한솥밥 먹는 사람들과의 대립이자 분열이자 불신일 겁니다.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내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김미순傳』의 동기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공단 프락치가 된 여성 노동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은 이 장시는 자꾸 피하고 싶었습니다.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저 자신을 보며 노동자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멀리하려는 심리를 지니나 봅니다. 마치 노동자들이 노동자 글들을 더 멀리하고 대중적인 연애시나 고상한 에세이집을 사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지긋지긋하니까요. 싸움과 가난과 고통이 가득한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서조차 들춰 본다는 일은.
―「박영근 : 행려의 시, 결핍의 시, 흰 빛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