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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기호학/언어학 > 언어학/언어사
· ISBN : 9788968178931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0-05-31
목차
인문학연구원장 인사말
머리말
1부 중세 유럽의 문자의 문화사
중세 유럽의 읽기, 쓰기, 노래하기•장 클로드 슈미트
중세 로맨스 문학에 나타난 위조 행위의 정치적 의미•윤주옥
중세 후기 필사본 여백에서 텍스트와 삽화의 상호작용•마쓰다 다카미
중세의 종교 교육과 문자 교육•이혜민
2부 인쇄매체와 서구 근대 문명
시대비판을 위한 매체로서 루터 성서의 삽화•최경은
근대 초 유럽 뉴스 팸플릿의 언어와 시대적 상황•니컬러스 브라운리스
17세기 근대 신문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황대현
신문소설의 탄생과 문자의 확산•김미성
3부 책의 과거와 미래 – 책의 은유와 문자의 존재 양태
책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은유, 현재의 불확실성•로제 샤르티에
문자와 책의 미래. 문자의 코드화와 책의 공존•유현주
책의 종말과 문자의 전자적 확장•미하엘 베첼
출처
저자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문자-정신이자 물질인 그 흥미로운 역사
윤혜준(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천국(Paradiso)』에서 극중 단테는 천상의 성녀로 변화한 옛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의 아름다운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가르침과 안내를 받으면서 계속 승천하다 제10곡 도입부에 이르면, 태양천의 문턱에 다다른다. 단테는 이때 문뜩 자신의 축복받은 처지와는 달리 땅에 두 발을 디딘 채 세속의 욕정과 번뇌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독자들이 자신의 『천국』이 제공하는 신비로운 비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까 우려하며 이렇게 독려한다. “그러니 들어 올리시라, 독자여, 저 높은 수레바퀴로 / 나와 함께 그대의 눈길을(Leva dunque, lettor, a l’alte rote / meco la vista, 7-8행).” 이어지는 몇 행에서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해 주던 시인은 그 나머지는 독자가 지금 앉아 읽고 있는 자리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각자 음미해야할 것이라는 충고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 이제 거기 머무시라, 독자여, 그대 탁자 앞에,
미리 맞본 그것을 되돌려 생각해 보며,
너무 물리기 전에 즐기길 원한다면.
그대 앞에 난 갖다 놓았네, 이제 한 상 잘 드시도록.
왜냐면 내 온 관심은 그 이야기 거리에
집중해야 하니까, 또 그걸 짓느라 난 필경사가 되었으니.
Or ti riman, lettor, sovra ’l tuo banco,
dietro pensando a cio che si preliba,
s’esser vuoi lieto assai prima che stanco;
messo t’ho innanzi: omai per te ti ciba,
che a se torce tutta la mia cura
quella materia ond’ io son fatto scriba. (22-27행, 윤혜준 역)
물질이자 정신인 ‘문자’ 내지는 ‘글’을 생각하는 이 저서를 대하는 독자에게 『천국』의 이 대목을 소개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쇄술 도입 이전 필사본 시대 서구 사회의 엄청난 예술적 에너지를 상기시키려는 취지도 있으나, 단테라는 ‘위대한 작가’의 ‘문학정신’을 새삼 강조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단테는 “내 온 관심”을 “집중”한 창작의 결실을 독자에게 제공하면서, 자신을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 “필경사”에 비유한다. 창작 작업이란 ‘정신’의 표출인 동시에 문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지면에 적는 육체노동이기도 하다. 마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의 노동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봉사의 수고이다. 독자로서도 그냥 눈길만 들어 올리는 것으로 단테의 천국 여행에 동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볼 수 없는 천국을 충분히 음미하고 맛본 것을 되새김질하는 노동을 수반해야 한다. 『천국』의 이 대목을 장식하는 비유들이 말해주듯, 문자의 세계는 이렇듯 정신으로만 존재할 수 없음을, 물질의 세계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 연루됨의 양태와 실체는 ‘역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위 대목에서 단테의 비유들을 이해하려면 필사본 시대를 떠올려야 하고, 그의 『천국』 여행 자체가 온갖 역사적 인물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단테를 이해하고 음미하는 일에서나 그밖에 인문학의 어떠한 업무에 있어서나 늘 필수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때의 역사란 오늘날 한국어에서 ‘역사’란 말이 으레 불러내는 거대서사의 정치성, ‘역사관’이나 ‘역사의식’의 정파적 호명에 반응하는 패거리 본능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이 제공하는 문자가 만들어지고 꾸며지고 읽히고, 그림으로 노래로 문자가 변신해온 흥미로운 사실들을 ‘역사’라고 부를 수밖에 없으나, 워낙 ‘역사’라는 깃발을 휘둘러대는 선동과 패싸움에 중독된 대한민국에서는 이 말을 쓰기가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딱히 대안이 없기에, 아니, ‘역사’가 정파적, 계급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서양의 문자 문명과 매체』는 ‘역사’ 연구서임을 강조하겠다.
모인 글들은 중세부터 오늘날까지 긴 시간에 걸친 역사적 장면들을 조명한다. 글쓴이들의 명단에는 국내 연구자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일본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해당 분야의 완숙한 중진 학자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대학자’라는 칭호를 수여하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분들도 있다. 이 글들이 다루는 지역의 중심은 프랑스, 독일, 영국이고,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부분적으로 언급된다. 이 저서는 제목 그대로, “서양”, 즉 서구의 모든 중요한 언어문화 전통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다. 이 책 이전에도 서구 문명에 대한 각종 저서들이 한국어로 수없이 출간되었고 이후에도 출간되겠지만, ‘문자’와 ‘매체’의 측면에서 흥미진진한 역사적 스냅 사진들을 모아놓은 저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서구의 ‘글’을 다룬 글들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서구의 ‘글’에 ‘나타난’ 또는 ‘담긴’ ‘정신’을 소개하는 데 진력하는 저서들이 대부분이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인문학은 ‘정신과학’이 아니던가? 이러한 반문이 즉각 나올 법하다. 그러나 나는 감히 이 질문에, “아니다, 인문학은 역사학이다”라고 답하겠다. 인문학이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이라고 가르친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 같은 이의 주장도 ‘역사’의 한 국면에서 등장한 제안일 뿐이지 모든 시대에 적용될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보다 확실한 명제는 인문학은 ‘수’의 세계가 아닌 ‘글’의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진술일 것이다. 인문학의 정체성을 딜타이보다 한참 전에 고민했던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 식으로 말하면, 역사를 초월한 수리적 명제들인 “진리(il vero)”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확인 가능한 언어적, 문자적 “진실(il certo)”이 인문학의 영역이다. 사실 딜타이도 ‘수리적 학문’과 인문학을 구분하려는 취지에서 ‘정신과학’이란 개념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정신’도 어딘 가에 거처를 둬야 한다. “서양”이라는 ‘정신’의 ‘거처’ 내지는 ‘거주지’는 이 책의 제목에서 제시한 대로 “문자 문명과 매체”라는 말로 명명할 수 있다. 정신과학으로서 인문학이 ‘정신’의 구체적인 ‘거처’와 ‘거주지’를 밝히는 본업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그러한 탐구의 또 다른 이름인 ‘서지학’과 ‘문헌학’이 ‘정신의 해석학’ 못지않게 중요함을 이 저서는 예시한다. ‘정신’으로서 ‘서구문명’의 해석을 담은 서구의 2차 자료를 다시 수입, 조합해서 소개하는 차원에 대체로 머무는 대한민국 서양학의 현실에서, 이 저서에 담긴 귀한 1차 자료들은 찬란한 빛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특징을 대변하는 글은, 책의 후반부인 9장에 배치되긴 했으나,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의 ?책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은유, 현재의 불확실성?이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에게 먼저 샤르티에의 이 글을 읽을 것을 권한다. ‘책’이라는 실체의 물질적 성격과 정신적 성격을 초기 근대의 세밀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예시하고 있는 이 대학자의 글은 아마도 한국 서양학의 또 다른 증상인 ‘최신이론’과 ‘첨단 용어’ 숭배의 풍토 속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이나, 문자의 정신뿐 아니라 ‘몸’에도 주목하는 인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 다른 프랑스 학자 장 클로드 슈미트(Jean-Claude Schmitt)의 ?중세 유럽의 읽기, 쓰기, 노래하기?가 제1장에 등장하는 것도 매우 적절하다. 사실 앞에서 단테의 『천국』 10곡을 떠올린 것도 슈미트의 이 글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샤르티에나 슈미트가 서술하는 역사는 ‘역사관’이니 ‘역사의식’이니 ‘역사의 변증법’이니 하는 가면을 쓴 권력의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다. 이들이 다루는 ‘문자’의 세미한 역사 속에서 비코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의 ‘진실’이 살아 숨 쉰다. 문자 생산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중세 수도원의 필사실(scriptorium)에서, 또는 인쇄소에서 부지런히 개입했던가! 그 노동은 마쓰다 다카미(Matsuda Takami)의 ?중세 후기 필사본 여백에서 텍스트와 삽화의 상호작용?이 보여주듯, 얼마나 아름답고 뛰어난 영상들로 꽃피었던가! 문자가 노래로 변하는 악보의 역사는 또한 얼마나 경이로운가! 지식인들은 ‘인류의 진화’와 ‘역사의 진보’를 설교하고, 정치꾼들은 ‘진보’의 믿음을 확성기와 시위로 강요하지만, 나는 (슈미트가 소개하는) 레오넹(Leonin)과 페로탱(Perotin)의 다성 음악을 들으며, 또한 (마쓰다가 소개하는) 정교하고 경건한 중세 필사본의 “서사적 머리글자(historiated initials)”에 감탄하며, ‘역사의 진보’라는 도깨비를 쫓아버린다.
다른 글들도 예외 없이 연구자들의 값진 노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니컬러스 브라운리스(Nicholas Brownlees)의 ?근대 초 유럽 뉴스 팸플릿의 언어와 시대적 상황?과 황대현의 ?17세기 근대 신문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나란히 읽는 것만으로도 초기 근대 서구사회에서 뉴스와 언론이 태동한 그 정황과 ‘자유 언론’이라는 독특한 ‘서구정신’의 ‘거처’를 충분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언론과 권력의 유착이 유달리 돈독해진 이 순간, 신문과 뉴스의 조상들을 불러내는 것도 새삼 신선한 일이 될 듯하다. 여기에 김미성의 ?신문소설의 탄생과 문자의 확산?을 같이 첨가하면, 독자들의 눈앞에서 신문 지면의 다채로운 역사가 촘촘히 재구성될 것이다. 최경은의 ?시대비판을 위한 매체로서 루터 성서의 삽화?는 초기 근대 서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종교개혁 한 복판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서구 및 나아가 이후 세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도, 중세 서구의 오래된 삽화 전통과 말끔히 인연을 끊기를 주저했음을 최경은의 이 글은 잘 보여준다. 이혜민의 ?중세의 종교 교육과 문자 교육?과 윤주옥의 ?중세 로맨스 문학에 나타난 위조 행위의 정치적 의미?는 일상생활과 지역문화 속에서 글 문화의 자취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의 10장과 11장은 역사의 시계를 급속히 돌려 21세기 초로 돌아와서 우리 시대의 현실과 대면한다. 유현주의 ?문자와 책의 미래, 문자의 코드화와 책의 공존?과 미하엘 베첼(Michael Wetzel)의 ?책의 종말과 문자의 전자적 확장?은 디지털 시대에 문자의 존재 및 활용 양태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을 소개한다. 문자의 역사적 “진실”을 다루는 것이 인문학일진대, 그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인문학의 장기이거나 주된 업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유현주가 지적했듯이, 컴퓨터가 “계산기계(Zahlmaschine)”에서 “이야기기계(Erzahlmaschine)”로 전환될 수 있을지, 또한 전환된다 해도 이야기기계가 하는 이야기가 여전히 사람의 이야기일지는 아직 평가하고 판단하기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흐름을 진단하는 이 글들은 이 책의 현재성을 보장한다.
『서양의 문자 문명과 매체』에 참여한 저자들은 함께 또는 다른 시기에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인문한국 문자연구 사업단이 주최한 학술행사에서 해당 글들을 발표했었다. 이 학술 향연들을 기획하고 진행하던 당시 책임자로서 내가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 이 글들을 한 자리에 앉아 발표자의 얼굴을 보며 ‘소리’로 들었던 때가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다. 저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이들과 함께 나눴던 시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인들이 가택연금 상태에서 서로 단절되어 있는 이 순간에는 더욱더 소중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만남은 순간이나 그 만남이 남긴 결실들이 또 다른 ‘글’로 남아, 만남의 ‘정신’이 이 책에서 ‘거처’를 삼아 거하며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이 우울한 시대와 울적한 나이에 작은 위안이 된다.
중세 유럽의 읽기, 쓰기, 노래하기
장 클로드 슈미트(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이 글에서 필자는 오늘날 현대인의 문자에 대한 근대적인 관계와 11-13세기 중세 유럽의 문자사용자들(litterati)의 문자에 대한 관계를 비교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비교는 우선 사회적, 인구통계학적인 측면에서 제시될 수 있다. 오랫동안 라틴어는 문자로 표기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로 인식되었고 극소수의 중세 성직자들만이 쓰고 말할 수 있는 언어였다. 이러한 중세의 상황은 오늘날 각국에서 사용되고 학교에서 교육되는 문자, 이를테면 민주적인 문자가 모든 사회 계층에 전파된 현상과 대비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사회적인 차원보다는 문자사용의 관행이라는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세시대에 이러한 관행의 특징은 ‘물질성’, 즉 문자사용 관행의 물질적 내용 및 신체 활동의 성격과 더불어 그 모든 특징 사이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여기에서 ‘연속성’이란 쓰기와 읽기의 형태, 글자의 필수불가결한 중계자로서의 음성의 울림, 단어의 의미와 그에 해당하는 소리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관계 사이의 연속성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인 읽거나 쓰는 사람의 ‘몸’에 대한 문자의 ‘추상화’ 및 근대적인 문자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연속성’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그러나 동시에 필자는 쓰기와 읽기의 근대적인 특징이 중세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러한 근대적인 특징은 일종의 길고 점진적인 발전과정을 거쳐, 인쇄술의 발명으로 가속화되었고, 컴퓨터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고대와 중세 필경사의 몸짓은 그가 써내는 글자의 형태 속에 오랫동안 잔류했다. 몸짓과 글자 사이의 이러한 연속성은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사라졌으며, 오늘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제 글자의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니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의해 발생하는 전기적인 충격이다. 중세의 독자에게는 문자와 큰 소리로 낭독되는 단어의 소리가 그 의미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텍스트의 의미는 소리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 위에서 우리가 해독하는 활자들의 소리 없는 형태에서 나타난다. 현대에는 문자문화와 구술문화를 대비시킨다. 반면 중세시대에는 구술문화가 문자문화와 함께 공존하면서 문자문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하기와 노래하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이는 독서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중세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중얼거리기, 단조로운 낭독, 고저를 붙여 읊기, 그리고 이쪽저쪽에 모두 속하는 다른 중간 단계의 읊조리기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