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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호남유학의 재구성

19세기 호남유학의 재구성

장복동, 류근성, 정용환, 최대우, 이향준, 안동교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01-26
  |  
2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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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호남유학의 재구성

책 정보

· 제목 : 19세기 호남유학의 재구성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88968491764
· 쪽수 : 528쪽

책 소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중심으로 19세기 호남유학을 재구성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노사학파의 학맥과 대표 인물들을 다루고, 제2부에서는 그들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자료를 선별하여 번역 소개함으로써 19세기 호남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목차

머리말 5
제1부 노사학파의 학맥과 대표 인물
Ⅰ. 머리말 10
Ⅱ. 노사의 삶의 여정 11
Ⅲ. 노사의 학문과 사상 15
Ⅳ. 노사의 저술과 유적 20
Ⅴ. 노사학파의 주요 학맥 23
Ⅵ. 노사학파의 유적 정리 62
제2부 노사학파 기초자료 발췌 번역
『노사선생문집』 109
『월고선생문집』 182
『월파집』 186
『노백헌선생문집』 195
『일신재집』 343
『중헌문집』 417
색인 516

저자소개

장복동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한국철학/한국실학/동양 사회철학이며, 대표논문으로 「정약용의 복수의 윤리 ? 법과 윤리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와 「호남유학의 한국적 지평 - ‘공공지식인’의 출현과 그 사회적 역할」 등이 있다. 전통철학과 현대사회가 접속하는 지점을 밝혀 전통철학의 체계를 ‘지금, 이 시대’의 삶과 사유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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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학력 및 경력 2004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박사 2001-2002 미국 아리조나 대학교 동양학과 연구학자 2004-2006 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 전임연구원 2006-2008 전남대학교 두뇌한국 박사후연구원 및 계약교수 2009-2012 전남대학교 인문한국 연구교수 2019-2020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동양학과 방문교수 2012-현재 순천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역서 - 『뚜 웨이밍의 유학강의』(번역), 청계, 1999 - 『장재의 철학: 기 해석과 성리학적 개념 체계』, 경인문화사, 2007 - 주희, 『주자대전』 1-13책(문집1-64권) 번역(공역), 주자대전 번역연구단, 2010 - 『유교·도교·불교의 감성이론』(공저), 경인문화사, 2011 - 『철학적 성찰로서 유교론』, 철학과현실사, 2011 - 『인(仁)의 재발견: 사랑과 협력의 근거』, 인간사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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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우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다. 저서로는 『호남의 유학자들』(전남대학교 출판부, 2016, 공저), 『이제마의 철학』(경인문화사, 2009), 『정다산의 경학』(민음사, 1989, 공저), 『유학사상』(전남대학교출판부, 광주고전국역총서, 1992, 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유학의 개척자들』(전남대학교출판부, 2013, 공역), 『중국 현대 신유학의 자아전환』(전남대학교출판부, 2018, 공역), 『동의수세보원 역해』(경인문화사, 2012), 『유학사상(연보집성)』(한국 전산출판사, 광주고전국역총서, 1994,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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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 (옮긴이)    정보 더보기
조선대학교 한국고전번역센터 선임연구원 『국역 송촌집』(신조사, 2012), 『국역 덕곡집』(어린왕자, 2012), 『규남 하백원의 실학사상연구』(공저, 경인문화사, 2007), 「간찰에 나타난 학술적 교유의 양상들」(『고문서연구』 38, 2011), 「정개청의 학풍과 절의의 함의」(『유교사상연구』 40, 2010)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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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부 노사(蘆沙)학파의 학맥(學脈)과 대표 인물

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유학자들은 다양한 경전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참된 가치, 내면의 바탕, 행위의 규범 등을 이해해왔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학문의 진정한 목적이라 여기고, 성인이 제시한 진리를 앞서 깨달은 사람을 스승으로 추앙했다. 따라서 스승을 교사라고 부르는 것처럼, 스승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후학에게 가르치는[敎] 역할을 담당하고,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學] 진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했다. 이와 같은 학문 풍토에서 바로 ‘학파’가 파생되었는데, 유학사에서 학파를 통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추구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 유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발자취를 남겼던 ‘노사(蘆沙)학파’도 이러한 역사적 전통 속에서 배태되었다. ‘노사학파’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라는 걸출한 스승과 그의 학문을 추종한 많은 문인들의 학단(學團)을 총칭한다. 따라서 그들이 보여준 학문 내용과 활동은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노사는 철저한 주리적(主理的) 체계의 성리설을 제시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리(理) 중심의 이기(理氣)체계와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이전 성리학의 논쟁점을 지양하는 한편, 시대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표명했다.
노사학파의 구성원들은 19세기 이후 대내적으로는 봉건지배질서체계가 무너져 가고, 대외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도전과 침략이 우려의 수준을 넘어 국가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철저한 주리적 성리설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가치체계의 재공고화를 통해 대내외적 모순을 타개해 가고자 하는 실천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노사의 학문과 정신이 문인ㆍ재전(再傳) 문인들을 통해 계승ㆍ발전되어 가는 과정과 모습을 ‘학맥(學脈)’을 통해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사학파 구성원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ㆍ집단적 학문성향과 행동양식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Ⅱ. 노사의 삶의 여정(旅程)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자는 대중(大中), 시호는 문간공(文簡公), 본관은 행주이다. 기재우(奇在祐)와 안동권씨의 아들로, 1798년(정조 22) 6월 3일에 전북 순창군 복흥면(福興面) 구수동(九水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금빛 얼굴의 대인(大人)이 한 사내아이를 안아다 주는 꿈을 꾸고 노사를 낳았기 때문에 어렸을 적의 이름을 금사(金賜)라 했다.
노사는 비범한 천품을 타고나 말을 하면서부터 문자를 해득했으며, 5세에 『효경』과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읽어 문리가 날로 성취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6세에 천연두를 앓다가 왼쪽 눈을 잃었다. 7세에 『소학』을 배우고 나서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때에 노사는 멧돌을 보고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고요한 이치를 나는 멧돌에서 보았네”라는 시구를 읊었다. 8세에 정월부터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보기 시작하여 6월에 끝마쳤다. 이때부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어려워하거나 막힘이 없어, 비가 죽죽 내리듯 환하게 깨달았으며 흐르는 물처럼 응답하였다. 이 무렵 학자들의 성리(性理)에 대해 묻자, “천리(天理)는 사물의 본성이니 성(性)이란 곧 리(理)이다. 리(理)에는 본래 성(性)이 없으나 성에는 곧 리(理)가 갖추어져 있다. 어린애들은 무지하여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고, 또 학자들의 격치(格致)에 대해 묻자, “마음이 사물을 향해 도달하는 것을 격물(格物)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을 알게 되는 것을 치지(致知)라 하니, 격물과 치지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고 답했다. 이처럼 노사는 어려서부터 성리학과 경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였다. 13세에는 백암사(白巖寺)로 들어가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책상 위에 놓고 단정히 앉아 깊이 음미하였으며, 뜰을 배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머리를 떨구고 깍지를 낀 채 종일토록 정좌하기도 했다.
14세에 울산 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18세 되던 해 5월에 부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10월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산을 정리하여 장성 하남으로 돌아왔다. 23세 여름에 남암사(南庵寺)에서 독서하고, 24세 가을에는 관암(觀庵)에서 독서했다. 28세에는 오촌(鰲村)을 지나가다 당시 기호(畿湖)유학의 종장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를 배알했다. 34세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이듬해에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0세에는 유일(遺逸)에 천거되어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44세에 부모의 묘소를 광주 서석산(瑞石山)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 45세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제수 받고 부임한 지 6일 만에 사표를 제출했고, 이어 평안도(平安道) 도사(都事)를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6세(1843년) 여름에 남암사(南庵寺)에서 피서하면서 「납량사의(納凉私議)」 초고를 작성하여 성리(性理)를 논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근세에 성(性)을 논하는 학자들이 리(理)와 분(分)에 어두워 이일(理一)을 형기(形氣)에서 떠난 곳에 한정하고 분수(分殊)를 형기에 떨어진 뒤의 일로 국한시키니 리(理)와 분(分)이 사이가 뜨고 성(性)과 명(命)이 엇갈려 성에 대한 논란이 비로소 천하에 분열되었다”고 주장했다. 48세에는 문인 이봉섭(李鳳燮)이 “「태극도설」에 ‘성인정지(聖人定之)’라는 ‘정(定)’자가 자신을 정함인가 타인까지 정함인가”를 묻자, 노사는 「정서설(定序說)」을 지어 일깨워 주었다. 또 「우기(偶記)」를 지어 사단칠정을 논변하였다. 50세에는 이응진(李應辰)의 서신에 답하여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와 심기체질(心氣體質)의 내용을 토론하고, 55세에는 권우인(權宇仁)의 서한에 답하여 이기(理氣)의 문제를 논했다. 56세에는 「이통설(理通說)」을 지었는데, 이는 권우인이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잘못 해석하여 본지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쓴 것이다. 59세에는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南, 1570-1637, 호 山西)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의 서문을 지어 붕당의 시비를 변론했다. 60세에 무장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64세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체직되었다.
65세(1862년)에 「삼정책(三政策)」(일명 壬戌擬策)을 올리려다가 실행하지 못했다. 이 해에 삼남에 민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전부와 군제와 환곡 등 세 가지 정책에 대하여 널리 구언했다. 노사는 봉사(封事)를 작성하여 사대부 습속의 문란이 현실을 급속히 파괴하게 된 증후라고 주장하고, 이어서 삼정의 폐단을 구해낼 방법과 실시할 계책을 제시했다. 67세 여름에 침수정(枕漱亭)에서 피서했는데 이 때 배종한 문인이 수십 명이었다. 69세(1866년) 6월에 집의(執義)를 제수 받고, 7월에 6조로 된 상소, 이른바 「육조소(六條疏)」를 올렸다. 이 때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도 조정에서 화친하자는 의논이 비등하자, 노사는 이 말을 듣고 상소하여 간사한 오랑캐의 정상을 말하고 방비할 계책을 말하였으며, 말미에서 또 안으로 덕을 닦는 것이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이 상소는 당시 이항로(李恒老)의 척사론과 함께 그 후로 계속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기본논리가 되었다.
77세(1874년)에 「납량사의」의 몇 문단을 고치고 「노사설(蘆沙說)」을 지었다. 79세에 호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81세(1878년)에 「외필(猥筆)」을 작성하여 문인 조성가(趙性家)에게 보여주었으며,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그 기문을 지었다. 82세(1879년)에 「납량사의」와 「외필」을 문인 김석구(金錫龜)ㆍ정재규(鄭載圭)ㆍ정의림(鄭義林)에게 보여 주었다. 이해 겨울에 『주역』을 보았는데 12월 21일에 병환이 생겼다가 29일에 생을 마쳤다. 이듬해 2월 15일에 봉산(凰山)에다 장사를 지냈다. 1892년에 문인 조성가(趙性家)가 「행장」을 지었고, 1901년에 최익현이 「신도비문」을 만들었으며, 1910년에 조정으로부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924년에 담대헌(澹對軒)을 중건하고, 이듬해에 석채(釋菜)의식을 거행했다. 1927년에 사우(祠宇)와 거경재(居敬齋), 집의재(集義齋)를 건립하여 고산서원(高山書院)의 규모를 갖추고 노사를 주벽으로 모셔 제향했다. 고산서원 이외에도 노사는 광산의 도림사(道林祠), 담양의 금곡사(金谷祠), 화순의 구암영당(龜巖影堂)ㆍ삼산사(三山祠)ㆍ고강사(高崗祠), 나주의 오봉사(五峰祠)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Ⅲ. 노사의 학문과 사상

1. 리(理) 중심의 철학
노사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남 장성으로 이사하여 평생 그곳을 생활 기반으로 삼아 학문에 정진했다. 동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대부분 사승(師承)관계를 뚜렷이 맺으면서 학문을 연마해간 것과 달리, 노사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사승관계 없이 자신의 탁월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높은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이로 인해 후대에 근세유학(近世儒學)을 대표하는 3인 중의 한 명 또는 이학(理學) 6대가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사는 세계를 리(理)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의 이기설에서는 불가피한 경우 ‘기(氣)’라는 용어를 쓰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분(分)’이라 표현한다. 그는 46세(1843년)에 고창 문수사의 남암(南庵)에서 쓴 역작 「납량사의(納凉私議)」에서 “기(氣)로서의 분(分)이 실은 리(理) 하나 가운데의 미세한 조리(條理)”이며, “리(理)와 대비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곧 기(氣)란 리(理)와 대립ㆍ대칭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81세(1878년)에 저술한 「외필(猥筆)」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기(氣) 역시 리(理) 가운데의 일”이라거나 “기(氣)가 어찌 리(理)와 대비되는 짝일 수 있는가”라고 말함으로써 주리적(主理的) 논점을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모든 “기(氣)의 발동과 유행이 리(理)의 명령을 받아 실현되는 것”이요, “기(氣)는 리(理)가 유행하는데 필요한 수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 성리학에서 리(理)의 기본적인 뜻은 모든 현상과 존재의 원인이 되는 원리ㆍ원칙을 가리키는 반면, 기(氣)는 모든 현상과 존재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기의 의미는 사실과 가치의 양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다만 가치적 측면에서 의미의 비중이 사실적 측면에서 의미의 비중보다 더 클 뿐이다. 특히 가치의 측면으로 볼 때 기(氣)는 그 자체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이른바 가치중립의 성질을 가진 것인데 비하여, 리(理)는 선(善)의 원인 혹은 선으로서 의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위에서 노사가 발언한 내용들은 사실의 측면에서 한 의미로 볼 여지가 없지 않지만, 리(理)가 실제적인 작위성이 없음을 고려한다면, 대체로 이것들은 가치의 측면에서 한 의미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언의 이면에는 벌써 행위상의 선악에 대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리(理)를 기(氣)에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노사가 가치중립의 태도를 벗어나 선의 원리 또는 선으로서 의리를 그만큼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노사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사단은 선(善) 한 쪽이니 리(理)로 말하고, 칠정은 선악을 겸한 것이므로 이기(理氣)를 겸한 것이다. ‘이기’라는 글자는 ‘선악’이라는 글자로 보면 무방하다.” 이처럼 그의 리(理) 중심의 성리설은 철저히 악을 피하고 선 또는 의리를 위하려는 의지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철저히 선 또는 의리를 실현하려는 목적의식이 그로 하여금 리(理) 중심의 성리학을 이룩하게 했던 것이다.

2.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
노사는 이미 청년시절에 권우인(權宇仁)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교와 노장의 공(空)ㆍ무(無)한 이론과 유학의 인의와 예(禮)에 기초한 충실한 도덕 이론을 대비ㆍ설명한 바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불교와 노장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유학을 호교적(護敎的) 관점에서 지지하는 노사의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노사의 위정척사론은 서학(西學)을 이단으로 격렬히 배척하면서 싹이 튼다. 노사는 1839년(42세) 겨울, 왕명으로 화양서원(華陽書院, 송시열을 제향)에 치제(致祭)한 일을 기록한 김재진(金在晉)의 시를 차운하여, “서학의 요괴를 도끼로 내려쳐 이목이 상쾌하니/ 이에 유학을 천명하여 온 누리를 안정시키네”라고 자신의 심정의 일단을 내비쳤다. 노사가 이 시를 짓던 해에 조선에서는 기해사옥(己亥邪獄, 7월)이 일어나 프랑스 신부 앙베르ㆍ샤스탕ㆍ모방 등이 사형되고, 척사윤음(斥邪綸音, 11월)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사도로 규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노사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의식하면서 서학을 이단ㆍ사설로,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규정하는 확고한 도식을 드러냈다. 나아가 노사는 서학의 천당 지옥설에 대해 불교의 극락 지옥설보다 더 요망하고 괴기한 술책이라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군주와 부모를 배반하고 사람들에게 세금을 교묘하게 거두어들이는 등 모든 악을 갖춘 종교로 인식했다.
노사의 위정척사론은 서양의 침략이 빈번하던 1866년(69세)에 올린 「병인소(丙寅疏)」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1862년(65세)에 작성한 「임술의책(壬戌擬策)」(실제로 올리지는 못함)에서 이미 ‘민심의 결집[結人心]’을 요체로 내수논(內修論)을 주장했던 노사는 이제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이 자행되자 내수를 기반으로 한 척사론을 강력하게 제기한 것이다. 그는 서양의 침략에 대해 극도의 우려를 표시하면서 6조목의 방비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외침에 대해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심의 합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정의 정책’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廟算不可不定]고 주장한다. 이 대책은 외세의 침략에 맞선 내부의 태도를 좀 더 강화하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척사에 대한 군주와 백성의 합일된 결의를 촉구한 그는 국가의 일정한 정책, 만민의 귀일하는 정신, 국론의 분열요소 제거 등 일원적인 체계 구성을 주장하고,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대해 흡입되고 동화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여 방책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둘째, 연해의 관원들이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정의 명령’을 정비해야 한다[先修辭令]고 주장한다. 이 대책은 서양 물건의 엄단을 통해 내적인 주체성을 확보하고 정당성을 갖춰 서양의 세력에게 우리의 입장을 보여주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적인 주체성과 정당성을 바탕으로 통상요구 거절의 이유가 서양의 부당함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셋째, 유사시에 대비하여 우리의 지세를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도록 지형을 잘 관찰해야[審地形] 하고, 넷째, 외침에 대비하여 군적(軍籍)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시켜야[鍊兵] 하며, 다섯째, 천하에 쓰지 못할 사람이 없듯이 이용하지 못할 방책이 없으므로 널리 좋은 의견을 구하되[求言] 한글로 쓰여진 것도 받아들여야 하며, 여섯째, 내정개혁을 과감히 단행하고 외양의 토대를 이뤄내는[內修外攘] 것이 급선무인데 이를 위해서는 민심의 결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대책은 상황적인 요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서양과의 대결이 이루어질 것에 대비하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대책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가운데 적극적인 척사론의 전개라기보다는 국가적 합일을 바탕으로 내부의 단결을 꾀하여 서양의 물리력을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대비하자는 수세적 입장의 방책이라 할 수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서양의 군대에 대해 수전(水戰)과 육전(陸戰)을 대비시켜 우리의 장점을 살리려는 지세의 이용을 제기하고, 치병에 대해서도 당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점이다. 아울러 구언(求言)에서도 한글로 쓰여진 것도 수용해야 함을 역설한 것은 비록 수세적인 척사 논의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인 주의ㆍ주장을 벗어나 신분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사상가 또는 철학자의 경우에나 그 사상 또는 철학이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사회적 환경과의 관련을 감안하면서 그의 전술한 주리적(主理的) 성리설을 되돌아본다면, 그 성리설의 실천적 성격은 결국 리(理) 중심의 의리사상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이 민족과 국가의 수호를 뒷받침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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