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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72757320
· 쪽수 : 240쪽
책 소개
목차
의상 담당
백과사전 소녀
토끼 부인
고리 집
종이 상점 시스터
손잡이 씨
훈장 상점 미망인
유발 레이스
유괴범의 시계
포크댄스 발표회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나는 의상 담당의 뒷모습이 멀어진 뒤로도 안마당에서 그녀 생각을 했다. 시든 화분과 수많은 의상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그녀는 홀로 작업한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상연될 연극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입을 옷을 짓는다. 내가 배달한 꾸러미에서 레이스 쪼가리 하나를 꺼내 어루만지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감을 만져온 손가락이 금세 그 속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옷감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을 반지 하나 끼지 않은 늙은 손이 건져 올린다. 그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잠시간 무대에 되살려내기 위한 의상을 생각한다. 이윽고 재봉틀에 실을 꿴다. 소맷부리에, 가슴에, 또는 치맛자락에 레이스를 꿰매 붙인다. 구부정한 등이 재봉틀과 하나로 이어져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무대의상 한 벌이 완성된다. 빠뜨린 데가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먼지를 털고,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고 나면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행어에 건다. 얼마 남지 않은 공간에 그럭저럭 쑤셔 넣은 의상은 금세 다른 의상들 속에 파묻힌다. 의상 담당은 이런 식으로 죽은 이를 위한 옷을 계속해서 만든다.
- 27~28쪽,「의상 담당」에서
대학 노트가 한 권 한 권 글자로 메워지고, 연필은 몽땅하게 줄어들었다. 등이 쑤시고, 공책은 땀으로 축축하고, 눈도 가물거리지만 신사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괜히 무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찬찬히 바라보며 감촉을 확인한 뒤 있던 곳에 되돌려놓는다. 그 일을 한없이 반복한다. 과거에 딸이 탐색했던 길을 따라가며 희미한 자취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애가 그렇게 바랐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을 대신 밟는다.
- 52~53쪽,「백과사전 소녀」에서
그곳은 결코 방이 아니고, 헛방도 아니고, 당연히 의자라든지 전등, 양탄자도 없는, 그저 문손잡이를 위해 존재하는 어둠이었다. 세계의 우묵한 구멍 같은 아케이드에 숨겨진 또 하나의 우묵한 구멍이었다. 그곳에 주저앉아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올바른 위치에 쏙 들어간 것처럼 몸이 편안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옅게 흐릿해졌던 속 알맹이가 다시 응축되는 듯했다. 페페도 꼭 같이 들어와서는 틈새가 없을 듯한 곳에 재주 좋게 파고들어 내 엉덩이와 다리 사이에 몸을 말고 누웠다.
어렸을 때는 관절이 삐걱삐걱 쑤실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좁은 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몸이 자라고 페페까지 있으니 더 좁은 게 당연하건만, 구멍과 몸의 라인이 조화를 이루고 어둠은 우리를 보듬어주었다. 어디에도 무리가 없었다. -136~137쪽,「손잡이 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