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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현대철학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 ISBN : 9788976828286
· 쪽수 : 344쪽
· 출판일 : 2023-08-31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7
약어 목록 32
서론 37
1장 이념과 유물론 49
1. 들뢰즈-마르크스주의를 둘러싼 서사 51
2. 들뢰즈-마르크스주의는 가능한가 62
3. 유물론의 미래와 이념 101
2장 자유와 자본 117
1. 자유주의 통치성: 인구와 욕망 119
에세이 | 이미 지쳐 버린 젊은 부르주아지
―우리는 빨리 생산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153
2. 신자유주의의 모순, 중단된 과정 156
3장 믿음과 제도 179
1. 구성주의적 제도 이론: 믿음의 정치 181
에세이 | 법은 텅 빈 개념이고 법규들은 영합적인 개념,
심지어 권리와 법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209
에세이 | 정치: 자연적 편파성과 제한된 공감을 가진 민중에게
일반적 이해관계를 믿을 만한 것으로 설득하는 것 213
2. 사회의 자기 제도화―민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218
4장 세계와 민중 245
1. 세계: 위상학적 공간 247
2. 민중: 공간의 생산 281
에필로그 323
참고문헌 331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투자하는 노동자. 그들은 노동자인가 부르주아인가. 이런 현실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몇 가지 기준들을 통해 그들을 노동자로 분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이 노동자인지 부르주아인지 분류하는 것이 힘들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그들은 임금이 상승하기를 바라겠는가, 투자한 주식의 상한가를 바라겠는가. 그들의 심리와 행동은 이미 부르주아인 것이다. “여전히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어디까지나 존재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 이 둘을 통합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결국,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점차 두 계급은 실제로 ‘부르주아’로 통합된다는 것으로, 역사를 주도하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소멸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들뢰즈-가타리의 계급에 대한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과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자본주의에서 계급적대는 없으며, 마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꿈꾸는 보편계급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부정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는 발언이다.
사람들은 혁명의 길이 파시스트적 경제 해법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시장의 운동’을 더욱 가속하는 것이 답이라고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두 저자의 결론이었을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저서 말미에 니체의 말을 다시 반복한다. “과정을 완성할 것, 과정을 멈추지 말 것…. 사람들은 흐름들의 탈영토화, 탈코드화 속으로 충분히 멀리 가지 못하리라.” 이 책 결론에서 반복된 니체의 말은 이제 질문이 아니라 결론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이 혁명의 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서 ‘시장의 운동을 가속하는 것’과 결론에서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너무나 명백히, 그리고 아주 교묘히 다르다. 논의 중간에 저자들이 던진 질문은 독자들을 얄궂게도 현혹하여, 마치 혁명의 방향이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인데, 그 과정이라는 것이 ‘시장의 운동’이라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 것이다. 글 쓰는 과정에서 저자들은 보통 독자들을 잘못된 길로 유도하고 사실 본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시장의 운동은 그 자체로 편집증적인 과정과 함께 운동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은 명백히 친자본주의적 입장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결론으로 가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자본과 시장의 운동은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원하는 편집증적 운동과 모든 것을 자본으로 해체하는 분열증적 운동이 시계추처럼 오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시장의 분열증적 운동만을 가속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열증적 과정의 가속은 오로지 욕망의 사용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의 분열증적인 경향만을 가속한다’는 테제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으며, 자본은 그 분열증적 경향을 강화하는 만큼 같은 정도로 편집증적 경향도 동시에 강화하기 때문에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베르네르가 카뮈의 이러한 태도를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들뢰즈가 내세우는 철학자의 실천적인 임무는 탈신비화인데, 신비와 미신은 우리를 행동하는 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철학으로서의 자연주의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피노자적 윤리가 기쁨 정념과 힘의 증대에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미신이라는 것은 우리를 슬픔 정념 속에 가두어 우리를 우리의 힘으로부터 분리하는데, 독재는 이러한 슬픔 정념과 불안, 두려움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만약 이를 카뮈와 연결시킨다면, 스피노자의 ‘미신’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카뮈가 거부하는 어떤 ‘절대적인 것’, ‘역사라는 이념’, ‘인간주의’ 등일 것이다. 스피노자를 통해 카뮈와 들뢰즈가 연결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