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지의 표본

약지의 표본
육각형의 작은 방

그의 손가락은 냉정하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목 칼라 아래 감춰진 가장 위쪽의 버튼도, 플레어스커트의 주름 안쪽에 있던 지퍼도 곧바로 더듬어 찾아냈다. 마찬가지로 내 조그만 속옷도 벗겨 냈다. 모든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그가 도맡았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단추며 호크가 벗겨지는 아주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도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단 한 가지, 검은 가죽 구두만을 남기고.

어째서 그가 구두를 벗겨 주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멈춘 뒤에도 나는 갈색 비닐구두가 벗겨져 나갔을 때와 똑같이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가죽 구두에는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다. 오렌지색 불빛에 훤히 드러난 내 어깨며 가슴은 서서히 식어 가는데ㅐ 구두에 감싸인 발끝만은 언제까지고 따스했다. 나 자신이 발목 언저리를 중심으로 두 개로 분리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검은 리본이 발등 한가운데 덜렁 묵여 있었다. - '약지의 표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