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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명상/선
· ISBN : 9788991596481
· 쪽수 : 380쪽
책 소개
목차
1. 이 분은 누구인가?
2. 가족 특징
3. 세 사람 중 누가
4. 여명의 일견
5. 새로 태어나다.
6. 루비콘 강을 건너다.
7. 작별의 편지
8. 아버지를 찾아서 집을 떠나다
9. 아버지의 발아래에
10. 몇 년간의 힘든 생활
11. 드디어 행방을 찾다
12. 산 위의 빛
13. 스와미와 책으로 배운 지식
14. A. 쉬바쁘라까삼 삘라이와 스와미
15. 가나빠띠 샤스뜨리와 스와미
16. M.V. 라마스와미 아이어, 에짜말, 라가바짜리
17. F.H. 험프레이즈와 스와미
18. F.H. 험프레이즈에게 준 가르침
19. '사두들'로부터 받은 성가심
20. 다시 가족들과 함께
21. 라마나 마하리쉬와 세샤드리스와미
22. 아쉬람에 일어난 강도
23. 친구 동물들
24. 기리쁘라닥쉬남, 성산 일주 순례
25. 스와미와 함께한 아쉬람의 하루
26. 아쉬람에서의 명상
27. 나따나난다 스와미, 요가 라미아와 후기 제자들
28. 서구로부터 온 헌신자
29. 서구로부터 온 헌신자 - 계속
S.S. 코헨이 쓴 에필로그
책속에서
나는 띠루반나말라이의 성산을 흠모하는 위대한 성자,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책의 서문을 쓰도록 요청받게 된 것을 나에게 부여된 매우 귀한 특혜라고 여긴다. 신의 섭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영적 하늘에 빛나는 별로 반짝이면서 쉴 곳 없는 낙담한 나그네를 영원하고 참된 행복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런 성자와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인류의 대다수가 이 환영의 세상이라는 유령에 현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만족감 하에서 그 유령을 붙잡으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늘 그들이 염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그들은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면서 실재가 없는 그림자를 쫒아 다닌 것에 대해 후회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 위대한 성자의 생애와 귀감은 우리에게 세상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함정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영성의 안전한 길로 접어들게 하는 빛나는 횃불의 역할을 한다. 사람을 강하게 끄는 그의 영향력은 하나의 은총이다. 그의 간단한 말 한 마디가 때로는 의심이라는 두터운 구름을 거두어내고, 무거운 가슴은 그의 짤막한 말로 가벼워지며, 심지어 난해한 철학의 얽히고설킨 수수께끼도 그의 직관의 샘으로부터 나오는 간단한 설명으로 만족스럽게 해결이 된다.
영적인 영광으로 가득한 이 살아 있는 기념비의 분명한 메시지에 얼마나 느리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이 성자가 이루었던 것을 깨닫고자 진정으로 시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 지를 보았을 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의 진화는 오늘날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영적 의식의 초월적 세계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때 그의 육체적 몸과 감각은 진정한 내면의 참나를 깨닫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 세상의 환영은 더 이상 모든 현상들의 토대를 숨기고 있는 베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투명한 매체이었다. 최고의 사기꾼인 마음은 그에게 있어 유순하고 충성스러운 하인이다. 그가 특히 즐겨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늘 그대 자신의 참나 속으로 물러나십시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의 거미줄을 엮어내는 그 근원을 찾으십시오. 일어나는 생각들을 무시하십시오. 생각의 뿌리에 집중하십시오. 그 고요와 평온 속에서 휴식하십시오. 그대의 노력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경험과 내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그것은 말로 된 설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희열의 거처에 도달한 자는 거의 없었다. 이 성스러운 성자가 우리의 시선을 끄는 또 하나의 주옥같은 영적인 진리는 “비록 많은 이들이 행복은 외적 조건에만 달려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행복은 진정으로 내면의 태도이거나 마음에 대한 주관적인 깨달음입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행복을 위한 외적인 추구는 단지 ‘숨바꼭질’을 하는 게임일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변화하는 사건들이나 환경들에 대해 마음가짐을 현명하게 적응하여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수중에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물론 현명한 분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그러한 적응을 수련함으로써 많은 슬픔과 불행, 우울은 피할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참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행복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희열이며 그러므로 영원하다.
‘나’를 아십시오,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삶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간단한 말이지만, 그것의 뜻은 많은 지식인들을 당혹하게 하였다. 여기서 다시 그는 단순한 지적인 탐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삶의 진정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진지한 열망을 가지고 굽히지 않는 수행을 할 때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위대한 영적인 사람들을 몽상적이고 비실제적인 것으로 비웃는 많은 회의론자들도 만약 이 성자를 찾아가서 그의 영적인 오라가 미치는 범위 내에서 상당한 시간 동안 머물러 있기만 하면 자신의 회의론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얼마 안 되는 제자들과 숭배자들이 들을 수 있었던 이 성자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그의 문답과 말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고, 대가답게 적절하고 명쾌한 문체로 이 책의 장들에서 그것을 구체화시킴으로써 현세대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유용한 도움을 준 이 책의 저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하는 바이다. 내가 이 서문을 통하여 이 책의 저자가 젊은 시절에 마침 나의 급우이자 법조계의 동료라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존중하고 있는 위대한 성자의 생애와 가르침을 다루고 있는 그의 책과 관련해서 우리의 옛 우정의 다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도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Sd.) K. 순다람 쩨띠, 대법원 판사
제5장 다시 태어나다
“너희들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산스끄리뜨)
“이 아뜨만은 베다의 암송으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명민한 지성이나 경전을 자주 들음으로써도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이 그를 선택해야 그는 ‘그것’을 얻는다. 아뜨만은 그에게‘그것의’ 형상을 드러낸다.”
- 까따 우빠니샤드.
벤까따라만의 삶에 찾아온 위기, 즉 그의 열의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고상한 깨달음과 이상에 대한 헌신의 삶으로 바꾸어준 위대한 일깨움은 1896년 중반기에 일어났다. 이때는 그가 17살 때였으며, 이 나이는 최대 다수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전환”을 경험하였거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의 이상과 성품의 변화들이 자기 억압에 항상 익숙해 있어 좀처럼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지 않는 그런 내성적인 사람에게 일어난다면, 외부인들이 그 변화들을 알아차리기는 항상 어렵다. 벤까따라만이 이러한 유형에 속해 있어 심지어 그의 친구들이나 형제들에게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말로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는 종종 그의 제자들로부터 그가 어떻게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를 질문 받았다. 다음은 대체로 “대체로substantially: 정확한 말은 기록되지 않았다. 보통 스와미는 매우 몰개성적으로 말한다. 그가 한 말속에는 ”나“ 혹은 ”당신“을 가리키는 어떤 분명하거나 뚜렷한 지시어가 거의 없다. 특히 따밀어의 특징은 그러한 몰개성적 말에 적합하며, 그는 일반적으로 따밀어로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과 습관을 연구하는 사람은 대부분 숨겨져 있는 인칭 지시어를 찾아낸다. 그가 실제로 사용하는 말은 너무 색깔이 없고 모호하여, 많은 독자들, 특히 서구적 유형의 독자들에게는 적합하거나 호소력이 없을지 모른다. 따라서 여기서는 뚜렷한 인칭대명사가 있는 통상적인 어법을 사용한다.
그가 직접 말한 내용이다.
“내 삶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내가 마두라이를 영영 떠나기 약 6주전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나는 삼촌댁 이층에 혼자 앉아있었습니다. 나의 건강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습니다. 나는 어떤 질병에도 좀처럼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매우 깊이 잠을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1891년 내가 딘디굴에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자고 있던 방 근처로 몰려들어 나를 깨우기 위해 소리치고 고함지르고 방문을 두드렸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들이 결국 방안으로 들어와 나를 격렬하게 흔들었을 때야 비로소 나는 나의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러한 깊은 잠은 오히려 건강이 좋다는 증거였습니다. 나는 또한 밤에 갑자기 몽유병에 걸리기가 쉬웠습니다. 내가 깨어있을 때 나를 희롱하는 것을 두려워한 약삭빠른 나의 놀이친구들은 내가 잠들었을 때 와서 나를 깨워 운동장을 데리고 다니면서 나를 주먹으로 치고 때리고 하면서 데리고 놀다가 다시 나를 침대에 도로 데려다 놓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내 나의 깨어있는 인물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온순함이나 겸손, 용서와 무저항의 태도로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곤 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밤에 겪었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몽유병으로 인하여 나는 생활하기에 더 약해지거나 건강이 더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또 그것을 병으로도 거의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내가 혼자 앉아있었을 때 나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갑작스럽고 분명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왜 그런 느낌을 가져야 했는지를 내 몸에서 느낀 어떤 것으로도 지금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때에도 나는 그것을 내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두려움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를 일부러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내가 죽어가고 있구나.’하고 느꼈으며, 당장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의사나 선배나 심지어 친구들한테도 자문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스스로 그 문제를 풀어야한다고 그때 그 자리에서 즉시 느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충격은 즉시 나를 내성적, 즉 ‘내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말을 내뱉지 않고 마음속으로,‘이제 죽음이 다가왔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죽어가는 그것이 무엇인가? 이 몸은 죽는다.’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즉시 죽는 장면을 연기했습니다. 나는 마치 사후 경직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사지를 뻗어 사지가 경직되었다고 생각습니다. 나는 나의 더 많은 조사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하여 시체를 흉내 내었습니다. 숨을 멈추고 어떤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에 단단히 힘을 주어 입을 꽉 다물었습니다. “‘나’라는 단어나 다른 어떤 단어도 입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엔?”하고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 몸은 죽었다. 그것은 경직된 상태로 화장터로 옮겨져 거기서 태워져 재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몸의 죽음과 더불어‘나’는 죽는가? 이 몸이‘나’인가? 이 몸은 활동하지 않고 생기가 없다. 하지만 나는 나란 존재의 완전한 힘을 느끼고 그리고 몸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내 자신 속의“나”란 소리마저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영, 즉 몸을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물질적인 몸은 죽지만 그 몸을 초월하고 있는 영혼은 죽음의 신도 건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는 영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 과정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살아있는 진리로서, 즉 어떠한 이의도 없이 내가 바로 지각했던 어떤 것으로 내 앞에 생생하게 번개처럼 지나갔습니다. ‘나’는 매우 실재적인 어떤 것이었으며,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몸과 연관된 모든 의식 활동은 그것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나’혹은 나의 ‘참나’는 강력하게 나를 끄는 힘으로 주의의 초점을 잡고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때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참나 안으로의 몰입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생각들은 음악의 다양한 음표들처럼 오가고 할 수 있을지라도, ‘나’는 다른 모든 음표들과 함께 어우러져 조화하는 근원적이고 토대가 되는 ‘스루띠’ 음표와 같이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몸이 말하거나, 책을 읽거나 어떤 다른 것에 관여하고 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나’에 중심이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가 있기 이전에 나는 나 자신을 분명히 지각하지 못했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에 끌리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눈에 뜨이는 직접적인 흥미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그것에 머물고 싶은 어떤 항구적인 성향은 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새로운 습관의 결과는 나의 삶에서 곧 드러났습니다.
먼저 나는 친구, 친척, 학업 등의 외부적인 관계들에서 내가 가졌던 조금의 흥미마저도 잃었습니다. 나는 기계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내가 책을 읽고 있음을 형들에게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나는 책을 집어 펴두었지만, 나의 주의는 공부와 같은 그런 피상적인 문제들로부터 멀리 벗어난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친척, 친구 등과의 관계에서 나는 겸손, 온순함과 무관심을 발달시켰습니다. 이전에는 다른 아이들 가운데에서 내가 어떤 귀찮은 일을 맡게 되면, 나는 때때로 공정하지 못한 일의 분배에 대해 불평을 하곤 하였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나를 놀리면, 나는 맞받아 응수하고 때때로 그들을 위협하면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였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놀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짓을 한다면 재빨리 그것이 그의 실수임을 인정토록 하곤 하였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변하였다. 떠맡게 된 귀찮은 모든 일, 모든 놀림, 모든 조롱을 유순하게 견디어 내었다. 화내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했던 옛날의 성격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스포츠 등을 하러 가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종종 나는 특히 명상하기에 좋은 자세로 홀로 앉아서 눈을 감고, 나 자신이나 영, 나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흐름이나 힘(아베삼)에 온전히 몰입하는 집중에 열중하곤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나를 비웃고, 나를 야니(성자), 요기스와라(요기들의 신)라고 칭하면서 옛날의 리쉬들처럼 밀림의 숲으로 들어가라며 익살맞게 충고하곤 하였던 형의 지속적인 조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계속하였습니다.
음식에 대한 선호와 편식이 사라졌습니다. 내게 주어진 음식은 맛이 있든 없든, 신선한 것이든 상한 것이든, 나는 그것의 맛이나 냄새나 질에 무심한 채 삼키곤 하였습니다.
새로이 나타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미낙시순다레스와라의 사원과 관련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곳에 가끔 갔으며, 친구들과 함께 가서 신상들을 보고 이마에 신성한 재와 주홍 색소를 바르고 어떤 뚜렷한 감동도 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새로운 삶에 눈을 뜨고 난 이후,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사원에 가곤하였습니다. 혼자 사원에 가서 쉬바 혹은 미낙시 혹은 나따라자 혹은 63명의 성자들의 성상 앞에 오랫동안 서 있곤 하였습니다. 나는 나를 압도하는 감동의 물결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몸을 지배하던 이전의 세력의 기반(아람바나)은 나의 영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이상 내가 몸(데아뜨마붓디)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은 새로운 세력의 기반(아람바나)을 가지기를 갈망하였으며, 따라서 자주 사원을 방문하였고 영혼의 충만은 많은 눈물로 넘쳐흘렀습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영혼과 함께 하는 신(이슈와라)의 유희였습니다. 나는 우주의 통치자요 모두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이며,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는 신인 이슈와라 앞에 서서, 나의 헌신이 깊어져서 63명의 성자들처럼 영원하도록 나에게 신의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곤 하였다. 대개 나는 기도를 하지 않았지만, 내면의 심연의 것이 계속 흘러나와 바깥의 것으로 흘러들어가게 했습니다. 눈물은 이렇게 충만한 영혼이 넘쳐흐르는 표시였지, 쾌락이나 고통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염세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삶이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환생을 피하고픈 욕망도 없었으며 해방을 추구하거나 무집착(바이라기야)이나 구원을 얻고 싶은 욕망도 없었습니다. 나는 뻬리아뿌라남과 나의 성경수업과 그리고 약간의 따유마나바르나 혹은 떼바람 이외의 다른 책들은 전혀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 (혹은 내가 무한하지만 개인적인 신이라고 부른 이슈와라)에 대한 나의 개념은 뿌라나들에 나와 있는 것과 유사하였습니다. 그때는 나는 브람만, 삼사라 등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의 근저에 하나의 본질이나 비개성적인 실재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나 자신과 이슈와라 둘 다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 띠루반나말라이에서 《리부 기따》와 다른 경전들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책들이 이전에 내가 분석이나 명칭도 없이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을 분석하여 이름을 붙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전의 언어로 표현하면, 나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의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상태를 숫다 마나스 혹은 쁘라갸나(즉, 깨달은 이의 직관)로 설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