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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충청 편)

이지누 (지은이)
알마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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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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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충청 편)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한국문화유산
· ISBN : 9788994963662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13-01-14

책 소개

저자 이지누는 오랜 세월 전국의 주요 절터를 수차례 답사해왔다. 이 책은 저자의 머릿속에 그려진 충청도 절터들 가운데 아홉 곳을 세심하게 선별해 다룬 책이다. 보령 성주사터부터 책의 여정을 시작해 김생사터까지 충청도 절터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목차

1장 보령 성주사터
뜨겁게 다가온 사람, 낭혜화상|그대로 믿고 따를 뿐 갈림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마라|눈보라가 빚어낸 아름다운 변상도變相圖|낭혜, 화엄과 선의 경계에 서다|오로지 제 할 일만 하고 계신 낭혜화상|절터에 보석처럼 깔린 낭혜화상의 금어錦語|⊙ 성주산 성주사터

2장 서산 보원사터
아! 너무도 찬란했다, 황홀했다 |그의 폐사지와 나의 폐사지| 통일신라와 고려가 모두 녹아 있는 5층석탑|나와 다른 너를 아우른다는 것|⊙ 가야산 보원사터

3장 당진 안국사터
낙엽이 향공양 올리는 절터|사회적 혼란기의 매향|삼존불 입상과 원주형 석불|안국사安國寺 혹은 안국사安國社|소금장수 스님과 소금의 전매|수원승도와 재가화상의 역할|소금과 매향 그리고 미륵불|뜻을 같이하는 용화향도가 묻은 향나무|비장秘藏하는 매향 암각문의 노출|결원향도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매향|침향으로 준비하는 용화법회|⊙ 은봉산 안국사터

4장 제천 사자빈신사터
별 총총한 밤하늘에 묻어둔 고독|집착이 망가뜨린 나 자신|탑과 인물상 중 어느 것이 비로자나불인가|아! 인물상은 사자빈신비구니였네|사자빈신비구니의 사자빈신삼매|《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속의 사자빈신비구니|⊙ 월악산 사자빈신사터

5장 제천 월광사터
낙엽이 빈 절터에 올리는 소리공양|도증과 원랑이 법등을 밝혔지만|지정학에 따라 세워졌던 사찰들|왕권강화를 위한 사찰 운용|소리는 보는 것인가, 듣는 것인가|낙엽 쌓인 빈 절터가 곧 원통전이네|소리를 놓고 말을 잊다|⊙ 월악산 월광사터

6장 충주 미륵대원사터
2,000년 묵은 고갯길 너머의 반가사유상|미륵원과 관음원에 머문 선비들|죽산-충주 국도변의 원주형 석불입상들|빗속에 나무처럼 서서 불렀다, ‘오! 미륵이여…’|⊙ 월악산 미륵대원사터

7장 충주 숭선사터
죽은 부모를 위해 절을 짓다|어머니의 명복, 그리고 호족세력과의 연대|권근의 언니가 머물렀던 숭선사|절은 무너지고 역참이 되어버렸네|⊙ 화계산 숭선사터

8장 충주 청룡사터
흥미진진했던 선사의 탑비|이색과 혼수스님의 삼각산 결사|선비와 스님의 아름다운 교유|CCTV에 굳어버린 몸과 마음|아름다운 쌍사자 석등과 부도탑|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를 지키다|⊙ 청계산 청룡사터

9장 충주 김생사터
귀신이 지킨 천년의 글씨|탑의 유혹에 빠져 절터를 헤매다|금장강 북쪽나루 김생사의 중수|김생의 글씨는 계약서나 쓸 글씨|다산, 왜 그랬을까?|김생과 완당의 문자반야|단단하지만 오히려 부드러운 글씨|⊙ 남한강 김생사터

저자소개

이지누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 문화를 섬세한 눈으로 톺아보며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하며 불교문화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발간된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추만호)에 사진작업을 했다. 그리고 퇴옹 성철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지금껏 큰스님들의 다비식을 기록해오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계간지인 《디새집》(열림원)의 편집인으로써 창간을 주도했다. 그 후 〈불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나라 안 폐사지에 대한 기록은 물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산재한 마애불의 기록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불교문화 외에 민통선 지역이나 비무장지대 그리고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조사와 사진기록을 하고 있으며, 이 땅의 순정한 민초들에 대한 작업도 이어 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폐사지 답사기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알마)를 비롯해,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샘터),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잃어버린 풍경 1.2》(호미), 《이지누의 집 이야기》(삼인), 《관독일기》(호미)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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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장 보령 성주사터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생활하며, 교사巧詐한 마음을 버리는 것, 이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그 말은 분명하니 그대로 따르고, 그 뜻은 오묘하니 그대로 믿으라. 도道를 부지런히 행할 뿐 갈림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마라.(낭혜화상)_21쪽

그렇게 다섯 시간, 정오가 가까워올 무렵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곤 눈이 쏟아졌다. 눈보라였다. 그토록 간구하던,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보라 말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눈보라는 모질었다. 그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건 말건, 사진기 렌즈에 눈이 쌓이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장갑조차 끼지 않은 손은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렸지만 쏜살같이 주춧돌로부터 석등에게로, 석등에게서 탑에게로 그렇게 절터를 쏘다녔다. 바람도 미쳤고 나도 미친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버린 듯 눈보라가 점점 거세질수록 더욱 신이 났다. 몸은 잔뜩 웅크렸을지언정 마음만은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얼굴로 들이닥치는 눈에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절터에 우뚝한 탑들이 재빠르게 스쳐가는 눈발에 에워싸인 모습을 말이다._23~24쪽

낭혜화상의 구도행은 당시 신라 하대를 관통하고 있던 보수와 개혁사상 모두를 두루 섭렵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화엄과 북종선 그리고 당나라에 가서 남종선의 홍주종을 익혔으며, 어린 시절에는 유가의 경전까지 읽었으니 이야말로 원융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더구나 그는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지금 현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것들을 폄훼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마음에 모두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성주사터는 그런 그가 신라로 돌아와서 중창불사를 일구어 다시 도량을 일으킨 곳이니 그 아니 아름다운 곳이겠는가._35쪽


2장 서산 보원사터
감은사터 3층석탑이 자연을 상대로 농사를 짓느라 잘 다져진 몸매를 가진 시골 농부의 모습이라면 이곳의 5층석탑은 피트니스 클럽을 다니며 가꾼 도시인의 몸매와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몸체에 화려한 사자상이나 팔부신장八部神將까지 새겼으니 그 아니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그는 절터를 찾은 순례자들을 단숨에 자신 앞으로 모이도록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섬세함에 이어 부드러운 포용성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크기 또한 크다. 찰주刹柱로부터 지대석까지 그 높이가 대략 10미터에 달하지만 어디 한 곳 흐트러짐이 없다. 그 기묘한 안정감은 탑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크기를 인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탁월한 비례의 구현에서 나오는 것이다._80쪽

살면서 겪어본 바로는, 나와 다른 무엇을 내치거나 외면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것을 아우르고 머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에 정치적인 입장이 개입되면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이다. 그처럼 쉽지 않은 일을 도모하고 실천에 옮긴 탄문의 생각은 1,0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것이 불교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건 아니면 개인의 삶에서건 말이다. 나와 다른 너가 있기에 세상은 유지되고 발전하며 미처 내가 헤아리지 못하던 것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거늘, 돌이켜보면 나는 또다른 너를 인정하기에 인색하기만 했던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다._94쪽


3장 당진 안국사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려 당시에도 스님이 되는 과정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요즈음도 한때는 출가에 따른 나이 제한이 있었지만 당시는 아주 어린 나이여야만 했다. 완전하게 스님으로 인정을 하는 구족계를 받는 나이가 대개 20세를 전후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사미의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사미 시절을 3년에서 5년 정도로 보면 15세 전후가 출가를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나이에 머리만 깎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공인하는 사원에 들어가 수계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수계를 받을 수 있는 사원은 관단사원官壇寺院이라고 했으며, 나라 안에 스무 곳 정도가 있었으니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만 스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_126쪽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관리 자체를 사찰에 맡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밝혔거니와 이곳은 개경과의 거리가 하루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일 뿐더러 소금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이었기에 보다 효율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요구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이다. 안국사安國社가 소금의 생산과 관리를 감독하는 관청이었거나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했던 곳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더불어 그곳이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안국사터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다._129쪽

미륵의 하생을 바라던 매향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는 아무래도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어수선한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와 맞닥뜨린 민중들은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고, 더구나 바닷가에 출몰하던 왜구에 의한 약탈이 잦아져 경제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민중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미래였을 뿐 현실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미륵은 구세주로서 민중들 속에 자리 잡았으며, 민중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예비하려 매향을 했던 것이지 싶다. 미륵이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와주기를 기원하며 비로소 그가 펼쳐놓을 용화세계龍華世界에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토록 지극한 마음을 천년이나 묵어야 침향이 되는 향목으로 표현했으니, 이는 자신의 당대에는 소용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막막한 행위를 하면서라도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려 애를 쓸 수밖에 없었던 절실한 마음, 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일인가. _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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