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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 ISBN : 9788997871179
· 쪽수 : 420쪽
· 출판일 : 2015-03-26
책 소개
목차
간행사-쉽게 풀어 쓴 청일전기 (류석춘)
제1부 청일전기
1917년 서문 (이승만)
1900년 서문 (이승만)
01. 전쟁 전 청국과 일본 간에 오고 간 외교 공문 9점 (1894.6.6. ~ 7.14)
02. 청일전쟁의 원인 (이승만)
03. 청국 관보(官報)에 반포한 조칙 21건 (1894.8.2.~1895.12.3.)
04. 청일전쟁 전후(前後) 세계 각국이 주고받은 전보
05. 일본 메이지 천황의 선전포고문
06. 조선 난리의 역사적 기록 (제 1부터 제 12까지) (알렌)
07. 시모노세키 조약 막전 막후
(1)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장에서 양국 대표들이 주고받은 대화
(2) 이홍장(李鴻章) 피격 사건
(3) 시모노세키 회담에서 이홍장이 일본 전권대표들과 주고받은 외교 공문
(4) 이토 히로부미의 답신 외교 공문 (청국 측 의견에 대한 일본 측 입장)
(5) 이홍장이 수정해서 보낸 외교 공문
(6) 시모노세키 평화조약 초본
(7) 이토 히로부미가 이홍장에게 1895년 4월 11일 보낸 최후 의견
(8) 이홍장이 이토 히로부미의 답신을 보고 4월 12일 보낸 회답
(9) 이토 히로부미가 4월 13일 (음력 3.19) 다시 보낸 외교 공문
(10) 이홍장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4월 14일 (음력 3.20) 보낸 편지
(11) 강화회담장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주고받은 대화
(12) 시모노세키 평화조약 최종 내용
(13) 평화조약에 첨부한 조항
(14)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맺은 휴전조약
(15) 평화조약 체결 후 일본이 점령했던 청국 봉천(奉天·펑톈)성 남쪽지역 반환 조약
(16) 일본 천황의 평화조약 체결 관련 담화문
08.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한 후 발표한 담화문
09.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임시조약
10. 청국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의 최후
(1)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가 정여창에게 보낸 항복 권유 편지
(2) 정여창이 이토 스케유키 사령관에게 보낸 답신
(3) 이토 스케유키 사령관이 정여창 제독에게 다시 보낸 편지
(4) 정여창 제독이 이토 스케유키 사령관에게 다시 회답한 편지
11. 청일전쟁 전후의 동북아 정세 분석
(1) 조선 대군주(고종) 폐하께서 종묘에 맹서하며 고하신 글 (홍범 14조)
(2) 한.청.일(韓淸日) 3국 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 (알렌·채이강)
(3) 청.일 양국의 정치가 서로 다른 이유 (알렌)
(4) 아시아 상황을 종합한 논의 (알렌·채이강)
(5) 러시아에 대하여 (알렌·채이강)
(6) 청일전쟁 참전기: 북양함대 지휘관으로 황해해전에 참가한 미국인 필로 맥기핀의 회고
12. 청일전쟁 이후 동북아 주변국들이 체결한 비밀조약
(1) 청.러시아 비밀조약
(2) 청.러시아 특별조약
(3) 전보 (1896.1~1897.10)
(4) 한성조약
(5) 모스크바 조약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
13. 청일전쟁의 교훈
(1) 조선 사신 민영환의 어록
(2) 청국 황제의 국서
(3) 영국 의회의 외교론 (알렌·채이강)
14. 권고하는 글 (이승만)
제2부 청일전쟁 이해에 필요한 배경지식 (김용삼. 김효선)
01. 청일전쟁 전후 조선의 정황
02. 동학과 대원군 그리고 청일전쟁
03. 일본군의 조선 파병 과정
04.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 설명
05. 황해 해전의 교훈
06. 일본이 청국에 제시한 시모노세키 평화조약 초안(1895. 4. 1)
이승만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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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1917년 출판된 『청일전기』 서문에서 이승만은 “만일 한인들이 오늘날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이나 대만(臺灣·타이완) 인종들의 지위를 차지하고 말 것 같으면 이 전쟁의 역사를 알아도 쓸데없고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을 터이지만, 우리는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여 태평양이 마르고 히말라야가 평지가 될 지라도 우리 대조선 독립은 우리 한인의 손으로 회복하고야 말 터인즉 우리 한인이 갑오전쟁(청일전쟁)의 역사를 모르고 지낼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청국이 1894년에 자기들보다 국력이 약한 일본에게 여지없이 패하고도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이유는 자기들의 힘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각국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형편을 우리가 자세히 알아서 기회를 잃지 말고 외교와 내치를 잘하면 남들이 우리를 넘겨다보는 행위가 다 막힐 것이다. 그럼에도 천하를 반대하여 여러 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니, 나라 하나 망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거니와 동서양에 큰 난리를 자기들 손으로 만들어 놓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는가.
조선 정부로부터 기한 내에 답이 오지 않자 일본은 7월 23일 새벽 4시,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붕괴시키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괴뢰정권을 출범시켰다.
일본 각료회의에서 조선 파병을 결정했을 때 일본 해군 함정들은 태평양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즉시 사세보(佐世保)로 집결하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다. 함정들이 사세보로 집결한 것은 각료회의에서 파병을 결정한 후 1개월 반이 지난 7월 19일이었다. 대본영은 먼저 도착한 함정들로 함대를 편성하고 해군 중장 이토 스케유키를 사령장관으로 임명한 다음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조선국 서안의 해안을 제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런 이유로 함대 명칭이 연합함대로 정해졌다. 다음날인 7월 20일 대본영은 조선에 파병된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적이 증가하기 전에 주력부대로 전면의 적을 격파하라”는 명을 내렸다.
일본군은 7월 23일 새벽 경복궁을 공격하여 조선군을 무장 해제하고 친일 괴뢰내각을 조직한 다음 대원군을 섭정으로 앉혔다. 이것이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이 조선군을 공격한 첫 전투였다.
7월 23일 오전 연합함대의 선발대가 사세보항을 출항했고, 7월 25일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8월 1일 청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공격한 것은 선전포고 전의 공격행위에 해당하므로 국제법 위반이다. 이토 히로부미 수상과 육군 대신 오야마 이와오는 현 단계에서는 청국과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면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했다. 반면에 참모본부의 가와카미 소로쿠와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군이 조선에 파병된 이상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청국과 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영향력을 동양에서 확대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