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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41602840
· 쪽수 : 432쪽
· 출판일 : 2025-12-26
책 소개
그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들이 담긴 자서전
환상의 ‘16장’이 포함된 국내 첫 완역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며 『롤리타』 『창백한 불꽃』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탄생시킨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는 유년 시절부터 미국으로 건너간 사십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특유의 정교한 언어로 담아낸 작품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차례 개정된 만큼 나보코프가 다른 어떤 작품보다 공을 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한국어판은 1967년의 최종판 『말하라, 기억이여 ― 다시 쓴 자서전』을 완역한 것이며, 나보코프가 익명의 서평가로 가장해 이 자서전에 대해 논한 메타적 성격의 ‘16장’이 수록되어 있다.
★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10대 논픽션 ★ 타임, 가디언 선정 100대 논픽션
우리가 몰랐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삶
러시아에서 보낸 유년 시절부터 서유럽과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는 나보코프가 원숙한 중년기로 접어든 1940년대, 『롤리타』와 비슷한 시기에 집필을 시작해 끊임없이 고쳐 쓰며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작품이다. 혁명으로 인해 자신이 속했던 세계와 고통스럽게 단절되었고, 평생 여러 나라를 전전했으며,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써야 했던 나보코프. 언어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것, 다시 말해 ‘기억이 말하도록’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필연적인 과업이었고, 그는 다름 아닌 자서전을 통해 그 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구성부터 평범하지 않은 이 자서전은 우선 여러 판본의 출간 및 개정 과정을 설명한 머리말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1장부터 15장까지는 매우 느슨한 연대기적 배열을 따르되 시간의 흐름보다는 나비, 체스, 가정교사 등 주제에 따라 모은 기억의 편린들이 담겨 있다. 마지막 16장은 나보코프 자신이 이 자서전에 대해 쓴 서평이며, 18점의 도판과 작가가 직접 만든 색인도 빼놓을 수 없다.
수천만 부가 팔리며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롤리타』는 나보코프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며 그의 이름을 문학의 전당에 아로새겼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진짜 인생’은 그 모든 성공과 논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작가 이전의 나보코프는 대단한 명문가의 귀족 도련님이었고, 나비를 먹어본 적도 있을 만큼 열광적인 나비 애호가였으며, 축구에 관한 시를 쓰고 골키퍼 역할에 푹 빠져 있던 청년이었다. 『말하라, 기억이여』에는 이렇듯 우리가 알지 못했던 나보코프의 다채로운 면모가 담겨 있다.
189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나보코프의 유년 시절은 무척 유복했다. 차르의 전제정치와 볼셰비키 독재에 맞서 싸운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에 의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며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던 어머니의 영향 역시 깊게 받았다. 소년 나보코프는 나비 채집과 시 창작을 즐기며 자연과 예술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먼저 크림반도로 피신했던 나보코프 가족은 1919년 결국 조국을 뒤로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나보코프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독일과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해 이반 부닌, 블라디슬라프 호다세비치 등 망명 작가들과 교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계대전과 나치의 박해가 유럽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는 1940년 첫 영어 소설을 들고 미국으로 떠난다.
『말하라, 기억이여』는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직전인 사십대 초반까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후의 삶을 담은 ‘계속 말하라, 기억이여’를 쓰려 했던 계획은 끝내 실현하지 못한 채, 나보코프는 1977년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보코프만이 쓸 수 있는 가장 예술적이고 탐미적인 자서전
아름다운 순간을 되살려내는 찬란한 기억의 프리즘
1940년대 후반, 나보코프는 『롤리타』 집필을 잠시 미루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자서전의 각 장이 될 글을 하나씩 〈뉴요커〉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묶어 1951년 미국에서 ‘결정적 증거’라는 제목으로 자서전 초판을 출간했다. 영국판 제목은 ‘말하라, 므네모시네’로 지으려 했지만, “제목을 발음할 수도 없는 책을 사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대 의견에 부딪혀 최종 제목은 ‘말하라, 기억이여’가 되었다. 그리스신화 속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는 예술을 관장하는 뮤즈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나보코프는 기억의 여신이 때로는 건망증 심한 짓궂은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서, 자서전 곳곳에 그녀를 등장시킨다.
이후 그는 자서전을 직접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또 그사이 여러 망명지에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지를 만나 사건의 세부 정황이나 가족사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그렇게 하여 다시 한번 개정된 것이 1967년의 최종판 『말하라, 기억이여 ― 다시 쓴 자서전』이다. 지금까지의 작업에 대해 나보코프는 “분명 진저리나는 일이었지만, 나비에게는 익숙한 이런 몇 겹의 변태 과정을 인간이 시도한 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는 정교한 문장으로 삶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되살려낸다. 개성 넘치는 대가족의 구성원과 하인들, 아련한 첫사랑, 베를린과 파리에 모인 망명 예술가들,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들…… 나보코프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소중한 존재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그는 이 모든 추억에 다가올 상실에 대한 예감이 내포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물론 그렇기에 더욱 황홀하고 특별한 순간이 된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는다. 나보코프가 회상하는 세계는 투명하고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해 보였던 기억은 나보코프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 찬란한 빛을 발하는 프리즘이 된다.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16장’
지적인 독자를 유혹하는 나보코프의 수수께끼
이번에 출간되는 『말하라, 기억이여』는 자서전 초판에는 실리지 않았던 ‘16장’까지 번역된 국내 첫 완역본이다. 16장에서 나보코프는 익명의 서평가로 가장해 자신의 자서전 『결정적 증거』를 논한다. 그의 실험적인 의도가 담긴 16장 덕분에 『말하라, 기억이여 ― 다시 쓴 자서전』은 단순히 내용을 다시 썼다는 의미를 넘어 자서전이라는 형식마저 새로 쓰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서평가는 『결정적 증거』를 다른 자서전들과 비교하며 “자서전이라고 보기에는 특이하고 기이한 존재”라고 평한다. 이 평가는 나보코프의 자서전이 사실을 나열하는 일반적인 회고록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독자는 이 자서전이야말로 나보코프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그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성숙한 창작의 핵심 요소들을, 축소된 크기로나마 품고 있었음을 입증하려 한다. 마치 무르익은 번데기의 얇은 껍질 너머로 아직 작은 날개집 안에 있는 나비의 색채와 무늬가 어렴풋이 보이고, 머지않아 껍질을 찢고 나와 번데기보다 몇 배는 큰 날개를 펼칠 나비의 축소판이 드러나는 것처럼.
_‘16장’ 또는 ‘『결정적 증거』에 대하여’ 중에서
나보코프 애독자라면 자서전 여기저기에서 그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요소, 그의 소설과 비슷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장은 별도의 제목이 있는 단편소설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자신의 과거를 소설의 재료로 사용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메타적 장치를 이용해 자서전이라는 형식 자체를 되물으며 허구와 진실 사이를 오가는 예술의 본질을 탐색한다.
소설은 허구, 자서전은 진실이라고 명확히 나눌 수 없는 상황에서 독자는 다른 자서전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심지어 소설을 읽을 때와도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실존 인물을 비틀어 만든 이름들, 영화의 복선처럼 숨겨진 힌트들, 그리고 색인을 읽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비밀 등 『말하라, 기억이여』는 나보코프의 말 그대로 “지적인 독자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목차
머리말 9
말하라, 기억이여
1장 21
2장 37
3장 59
4장 92
5장 111
6장 140
7장 166
8장 181
9장 205
10장 230
11장 254
12장 270
13장 298
14장 324
15장 347
‘16장’ 또는 ‘『결정적 증거』에 대하여’ 367
도판 389
해설 | 기억의 예술가 나보코프 401
옮긴이의 말 41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연보 419
색인 425
책속에서
현재의 『말하라, 기억이여』 최종판에서는 최초의 영어판을 기본적으로 손보고 풍부한 내용을 보탰을 뿐 아니라, 영어판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정한 내용들을 다시 적용하기도 했다. 애초에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던 기억을 영어로 서술하고 그것을 러시아어로 바꿨다가 다시 영어로 바꾼 이 작업은 분명 진저리나는 일이었지만, 나비에게는 익숙한 이런 몇 겹의 변태 과정을 인간이 시도한 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를 빚어낸 도구의 정체, 삶이라는 인쇄지에 예술의 등불을 비춰야 그 독특한 무늬가 보이도록 내 삶에 특별히 복잡한 워터마크를 찍어놓은 그 알 수 없는 롤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환경적 요인에서도 유전적 요인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다.
마치 몇 년 안에 자신의 세계에서 실재하는 부분이 사라져버릴 것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우리 시골 영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시간의 표식들을 의식하는 특별한 능력을 연마했다. 지금 내가 어머니의 모습과 나의 과거를 열정적으로 회상하듯, 어머니도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의미에서 절묘한 환영—아름답지만 만질 수 없는 재산,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영지—을 물려받은 셈이다. 이는 이후의 상실을 견뎌내기 위한 탁월한 훈련이었음이 판명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