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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 ISBN : 9791143004505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5-08-08
책 소개
목차
잎 葉
추억 思出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彼は昔の彼ならず
장님 이야기 めくら草紙
다자이 오사무 전기 문학과 ‘꽃’의 상징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에서
소녀의 니혼바시에서의 장사는 장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첫째 날에는 빨간 꽃이 한 송이 팔렸다. 손님은 무희였다. 무희는 피어나려는 붉은 꽃봉오리를 골랐다.
“피겠지?”
드세게 말했다.
소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핍니다.”
둘째 날에는 술 취한 젊은 신사가 한 송이 샀다. 이 손님은 취해 있는데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것이든 괜찮아.”
소녀는 어제 팔다 남은 꽃다발에서 하얀 봉오리를 꺼내어 건넸다. 신사는 훔치듯 슬그머니 받았다.
매상은 그뿐이었다. 사흘째, 바로 오늘이다. 차가운 안개 속에 오랫동안 계속 서 있었지만, 아무도 뒤돌아봐 주지 않았다.
(…)
소녀는 그 포장마차를 나와 전차 정류소로 가던 도중, 막 시들기 시작한 안 좋은 꽃을 세 명에게 건넨 것을 깊이 후회했다. 갑자기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슴에 십자가를 긋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로 격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일본어로 두 마디 했다.
꽃이 피기를. 꽃이 피기를.
-〈잎〉 중에서
미요에 대한 기억도 점차 옅어졌다. 사실 한집에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좋아하는 게 왠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평소에 여자들 흉만 봐 왔던 터라, 동생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미요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렵, 유명한 러시아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한 여죄수의 경력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그 불행은 그녀 남편의 조카뻘 되는 귀족 대학생의 유혹에 넘어간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그 소설의 묘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 둘이 라일락이 만발한 꽃 아래에서 첫 키스를 나누는 페이지에 마른 잎사귀 책갈피를 끼워 두었다. 멋진 소설을 남의 일인 것처럼 시치미 떼고 읽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 두 사람이 미요와 나를 닮은 것 같았다.
-〈추억〉 중에서
정원에는 다섯 그루의 철쭉이 벌집처럼 피어 있었다. 홍매화 꽃은 지고 싱싱하고 푸른 잎이 보이며, 백일홍 가지 가지에 가냘픈 어린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덧문도 닫혀 있었다. 나는 가볍게 두세 번 문을 두드리며, 기노시타 씨, 기노시타 씨, 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덧문 틈 사이로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이가 들어도 인간은 몰래 엿보는 재미가 있나 보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거실에서 잠자고 있는 느낌이었다. (…) 설마 지금까지 자는 건 아니겠지 했다.
세이센의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현관문도 열려 있었다. 말을 건네자, 누구세요? 하는 세이센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아아, 들어오시지요.” 거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실내 공기가 왠지 음침했다. 현관에 선 채 거실 쪽을 들여다보니, 세이센은 잠옷 차림으로 이부자리를 급히 치우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전등불 아래에서 본 세이센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늙어 보였다.
(…)
“집세는 당분간 힘들겠습니다.”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이 도망갔습니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