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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큰글 현대수필 8

[POD] 큰글 현대수필 8

(최남선 외 1925)

최서해, 한용운, 현진건, 홍사용, 최남선 (지은이), 큰글 편집부 (엮은이)
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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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큰글 현대수필 8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POD] 큰글 현대수필 8 (최남선 외 1925)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5040706
· 쪽수 : 206쪽
· 출판일 : 2014-08-05

책 소개

큰글자책이 필요한 모든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큰글 현대수필>. 1910~1950년대 우리나라 민중들의 삶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나와 같은 공간, 다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 그들이 울고 웃고 견디고 간직한 삶을 통해 현재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다.

목차

최남선
11 가을이 왔다
―새 세계의 전개를 보자
18 백두산 근참기
51 심춘 순례 서

최서해
61 연주창과 독사
64 값없는 생명
69 봄!봄!봄!
74 봄을 맞는다

한용운
81 선
82 우교
86 인격
88 겸손
90 감사를 느끼는 마음

현진건
95 거리에서 만난 여자

홍사용
101 산거의 달
105 우송
110 진여
116 궂은비
121 추감
127 처마의 인정
132 귀향
172 그리움의 한 묶음
198 청산백운

저자소개

최서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24년 「토혈」, 「고국」으로 등단했다. 1925년에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중견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7년에는 조선문예가협회의 간사직을 맡았으며 전 해에 휴간한 조선문단을 남진우가 인수하여 1월에 다시 입사하지만 4월에 또 실직했다. 위문 협착증을 앓던 그는 대수술 중에 과다 출혈로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은 ‘체험문학’, ‘빈궁문학’, ‘저항문학’으로 규정된다. 몇 명의 엘리트의 눈으로 바라본 일부의 삶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대다수의 극빈층의 생활상을 날카롭게 표현해 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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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속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호는 만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한문과 경전을 통달했고, 14세에 조혼했으나 집을 나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 등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출가했다. 일본을 방문해 신문물을 접한 뒤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수정과 공약삼장 작성에 기여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20년대에는 『유심』지를 창간하고, 1925년 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해 상징적 언어로 독립정신을 노래했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참여해 사회운동을 이끌었으며, 불교를 통한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1944년 영양실조로 입적했다. 그의 삶은 수행자이자 저항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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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제강점기 조선 문단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식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민족적 저항의식을 실천한 지식인이다. 1900년 대구에서 개화파 계열의 집안에 태어나 일본 도쿄 세이조중학교에 이어 상하이 후장대학 등에서 유학하며 국제 정세와 민족 문제에 눈을 떴다. 이러한 해외 경험은 그의 문학관과 민족의식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고향> 등 여러 단편을 통해 폐색된 식민지 일상, 궁핍과 부조리에 직면한 소시민과 지식인의 삶을 예리한 구성과 간결한 문체로 형상화했다.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했으나 한결같이 친일 노선과 거리를 두고 창작을 이어갔으며, 194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현실의 비극을 정면으로 끌어와 독자에게 윤리적 자각을 환기하는 그의 단편들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 형식의 성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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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새별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00년 5월 17일(음력),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492번지다. 석우리(石隅里)는 속칭 ‘돌모루’라 불리는 곳으로, 남양 홍씨의 집성촌이며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된 바 있다. 1920년 박종화, 정백 등과 순문예 동인지 『문우』를 창간하였고 1922년 문화사를 설립하여 신문학운동을 주도하던 동인지 『백조』를 발간했다. 1923년 토월회에 관여하면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토월회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신극운동에 뛰어들었다. 1927년 박진·이소연 등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를 결성해 창작희곡 「향토심」을 공연했으며, 1930년 최승일·홍해성 등과 극단 ‘신흥극장’을 조직해 연극운동을 이어나갔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로 대표되는 신시는 물론 「저승길」, 「봉화가 켜질 때에」 등 민족의 현실에 밀착한 소설을 창작하였고, 「조선은 메나리 나라」와 같은 비평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창작예술론을 전개하며 민요시 창작에도 힘썼다. 검열로 인해 「벙어리굿」 등 일부 작품은 실전되었으나 「흰 젖」, 「출가」 등 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편희곡을 창작하였고, 그 외에도 다수의 희곡작품을 창작, 번안, 각색, 연출했다. 매체를 확장해 라디오극을 발표하기도 하고 대중가요의 번역가이자 창작자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 희곡 「김옥균전」을 집필하다 원고를 압수당한 후에는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35년을 전후해 서울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흰 고무신과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다니며 한방치료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전한다. 1940년 강경·전주 등지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사찰을 순례하고 불경을 연구하였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담해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1월 5일, 폐환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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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원작)    정보 더보기
시인, 출판가, 문화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근대 초기 우리 문학 및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대대로 잡과 합격자를 배출한 중인 집안의 영향 속에서 최남선은 어린 시절부터 신문명과 관련된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치고 7∼8세 무렵에는 한문을 배워 중국어로 번역된 신문명 서적을 읽었다. 13세가 되던 해인 1902년에는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로 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서구의 근대 풍경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 15세가 되던 해인 1904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일본 도쿄에 있는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서 유학했고 이듬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06년에 재차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지리역사과에서 공부했지만 1907년 3월 학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바로 돌아오지 않고 이듬해인 1908년 8월에 귀국했다. 약 2년 3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신문물, 특히 출판에 큰 자극을 받았다. 1908년 일본에서 인쇄 기구를 들여와 경성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했다. 이 신문관에서 발간한 잡지가 한국 최초의 근대 잡지인 ≪소년≫이다. ≪소년≫이 한일강제합병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된 뒤에도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잡지 출판을 이어 갔다. 잡지 출판 외에 조선의 고서적을 발굴 출판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고서를 출판한 데 따른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1911년 조선광문회를 설립하며 조선의 고서를 자주적으로 발굴하고 출판해 널리 보급하고자 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조선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 단군에 대한 연구 등으로 확장되었다. 계몽운동에 대한 탐구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행동에 옮겨지기도 했다. 그는 당시 민족대표 33인 또는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에 최남선은 3.1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2년 8개월의 수감 기간 동안 최남선은 1920년대 자신이 추구할 작업의 기초를 다졌는데, 그것을 출감 후 <단군론>(1926), <불함문화론>(1927) 등으로 구현해 냈다. 이 작업들은 역사학과 민속학과 관련된 작업들이었는데 <심춘순례>, <백두산 근참기> 등의 현장 답사 기행문 등과 병행했다. 이는 조선적인 것의 기원을 찾으려는 일련의 작업들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주간 잡지 ≪동명(東明)≫(1922)을 발행하고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는 등 지속적인 출판운동을 펼쳤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민족 운동가로서의 면모는 1927년 변화의 양상을 맞이했다.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최남선은 친일 성향으로 변모했다. 일제의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적극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39년에는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하고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발효되면서 최남선은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낸 수감생활은 짧았다. 그는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도 우리 역사에 대해 연구했으며 1951년 해군전시편실 고문을 지내고 1952년 육군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했다. 1955년 뇌일혈로 쓰러진 후 투병하다가 1957년 10월 10일, 향년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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