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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중세사
· ISBN : 9791160870787
· 쪽수 : 172쪽
책 소개
목차
옮긴이의 말
서문에 부쳐
제1장 최초의 대학들
머리말
볼로냐와 남유럽
파리와 북유럽
중세의 유산
제2장 중세의 교수들
교과와 교과서
수업과 시험
학문적 위상과 자유
제3장 중세의 학생들
자료
학생 편람
학생 편지
학생 시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속에서
대학은 성당과 의회처럼 중세의 산물이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과거 일고여덟 세기 동안 통용되었던 의미에서의 대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에게도 고등교육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학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들의 법학, 수사학, 철학 교육은 가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은 영구적인 학습 기관의 형태로 조직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교사는 졸업장을 준 적이 없었다. 만일 오늘날 어느 학생이 그의 밑에서 석 달쯤 수업을 들었다면, 그는 자신이 교육을 받았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물론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는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논의 주제일 테지만) 수료증을 요구했을 것이다. 12~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형태의 교육 조직이 세상에 등장한다. 그것은 학부, 칼리지, 교육과정, 시험, 졸업, 학위를 특징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이런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파리와 볼로냐의 계승자들이다.
학생들은 교수가 지켜야만 하는 행동 강령을 공포했는데, 그들 각자가 낸 수업료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으려는 조치였다. 가장 초기의 규정(1317)을 보면, 교수는 단 하루도 허가 없이 결석해서는 안 된다. 그가 도시 밖으로 나갈 때는, 다시 돌아온다는 서약과 함께 예치금을 내야만 했다. 만일 교수의 정규 강의에 수강생이 다섯 명 미만이면, 그는 폐강에 준하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얼마나 형편없는 강의면 학생이 다섯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교수는 종소리가 나면 수업을 시작해서 다음 종이 울리면 1분 내로 수업을 마쳐야 한다. 교수는 교재의 내용을 임의대로 건너뛰지 말고, 어려운 내용이라고 뒤로 미루어서도 안 된다. 그는 매년 정해진 학기마다 정해진 분량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다. 한 해가 끝나가도록 서문과 참고문헌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식의 요구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학생 조직이 필요했다. 학생들은 출신 지역(nation)에 따라 두 개에서 심지어 네 개까지 학문 공동체(university)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집단을 대표하는 총장(rector)을 선출했다. 단연코 볼로냐는 학생들의 대학이었고, 이런 전통이 남아서인지 이탈리아의 학생들은 여전히 대학과 관련된 일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데 거침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팔레르모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곳은 겨우 학생 소요가 진정된 참이었다. 학생들은 부정기(不定期) 시험을 확대하고 종합시험의 비중을 낮출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대학 본관 유리창들을 파손했다. 지난 5월 파도바 대학의 700주년 기념일에 학생들은 말 그대로 도시를 점령하고 점잖은 공식 행사들을 자신들의 떠들썩한 가두행진과 축하 소동으로 마비시켜 버렸는데, 이때도 이 도시의 유서 깊은 시청 유리창들은 남아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교과, 의학, 신학과 같은 다른 교과목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볼로냐는 어디까지나 시민법 학교로 유명했고, 그래서인지 법학 공부가 단순히 학문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중요했던 이탈리아, 스페인, 남프랑스에서 대학 조직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이들 대학 중 일부는 볼로냐와 경쟁하였는데, 인근의 이탈리아 학교들은 물론이고 멀게는 몽펠리에와 오를레앙이 그러했다. 1224년 프리드리히 2세는 나폴리 대학을 세웠다. 이로 말미암아 시칠리아 왕국의 학생들은 북쪽의 교황파(Guelf) 거점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고도 고향에서 황제파(Ghibelline)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 해 전에는 볼로냐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맞수인 파도바 대학을 세웠다. 작년에 이 대학의 700주년 기념식에서는 참석자 만 명의 제청으로 볼로냐 대학에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두 대학 간의 해묵은 불화를 치유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시기에 파도바는 볼로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포샤가 그 대학에 법률 자문을 구하고 갈릴레오의 후광이 비추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