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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85393926
· 쪽수 : 640쪽
책 소개
목차
1권: 가난한 자
1장 양지와 음지
2장 길동무
3장 집으로
4장 애프리가 꿈꾸다
5장 가족사업
6장 마셜씨 교도소 아버지
7장 마셜씨 교도소 딸
8장 꽉 닫힌 교도소
9장 작은 엄마
10장 나라를 통치하는 기술
11장 풀려나다
12장 블리딩 하트 단지
13장 족장
14장 작은 도릿의 파티
15장 애프리가 또 꿈꾸다
16장 보잘것없는 자의 나약함
17장 보잘것없는 자의 연적
18장 작은 도릿을 사랑한 남자
19장 마셜씨 교도소 아버지가 맺는 인간관계
20장 상류사회 드나들기
21장 머들 선생의 지병
22장 수수께끼
23장 기계가 돌아가다
24장 점을 치다
25장 음모꾼 등등
26장 보잘것없는 자의 마음 상태
27장 스물다섯까지 세렴!
28장 보잘것없는 자가 사라지다
29장 애프리가 또 꿈꾸다
30장 신사가 한 말
31장 기백
32장 또다시 점치다
33장 머들 부인이 불만을 털어놓다
34장 바너클 무리
35장 팽스가 작은 도릿 손금을 보고서 안 말한 것
36장 마셜씨 교도소가 아버지를 잃다
책속에서
누구든 노려보니, 눈동자가 시큰거린다.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 해안은 바닷물이 증발하며 옅은 안개구름이 천천히 일어나는 덕분에 약간 누그러져도, 다른 곳은 아니었다. 먼지를 덮어쓴 채 이글거리는 도로는 머나먼 산 중턱에서 노려보고, 계곡에서 노려보고, 끝없이 뻗은 들판에서 노려보았다. 도로변 주택 위로 머리를 내밀다 먼지를 뒤집어쓴 포도나무도, 대로변에서 단조롭게 타들어 가는 가로수도 땅과 하늘이 노려보는 눈빛에 축 늘어졌다. 짐마차에 매여서 방울 소리를 나른하게 울리며 내륙 쪽으로 줄지어 느릿느릿 기다랗게 나아가는 말도 축 늘어지고, 꾸벅꾸벅 졸다 가끔 깨어나는 마부도 축 늘어지고, 들녘에서 힘들게 일하는 일꾼도 축 늘어졌다. 살았거나 자라나는 생명체는 누구나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에 하나같이 사그라들었다. 울퉁불퉁한 돌담 위로 빠르게 지나는 도마뱀과 맴맴 소리를 메마르게 뱉어내는 매미만 예외였다. 흙먼지 자체도 갈색으로 그을리고, 흔들리는 대기는 공기조차 숨을 헐떡이는 것 같았다.
“나는 예민하고 용감합니다. 예민하고 용감한 걸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성격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집사람 처가 쪽 남자들이 속을 털어놓았더라면 나도 대화로 풀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그걸 알면서도 은밀하게 음모를 꾸몄으니, 불행하게도 집사람과 나는 툭하면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돈이 약간 필요할 때마다 충돌하지 않으면 돈이 손에 안 들어왔습니다…… 남을 지배해야 마땅한 성격을 가진 사내가 말입니다! 어느 날 밤에 집사람과 나는 연인 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사랑스럽게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바다가 쑥 들어오는 절벽이었는데, 나쁜 별자리에 영향을 받아, 집사람이 처가 식구들 얘기를 꺼냈습니다. 나는 상식적으로 풀어가며, 처가 식구들이 남편을 질투하고 흉보는 말에 영향을 받는 건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뿐이라고 충고했습니다. 집사람은 반박하고, 나도 반박하고, 집사람이 흥분하고, 나도 흥분해서 집사람을 자극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나는 솔직한 성격도 있으니까요. 마침내 집사람은 내가 영원히 후회할 수밖에 없는 분노에 휩싸인 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어, 내 옷을 찢고, 내 머리칼을 움켜잡고, 내 손을 할퀴고, 두 발로 흙바닥을 쾅쾅 내려치더니, 결국에는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고 바위에 부닥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게 사고 경위로,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내가 집사람한테 재산을 모두 양도하도록 요구하고,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집사람과 몸싸움을 벌이다 살해했다는 식으로 왜곡한답니다!”
많은 사람이 캐스비 노인에게 기쁘게 수여한 명칭은 족장이었다. 동네 할머니 대부분이 캐스비 노인이야말로 ‘마지막 족장’이라고 말했다. 백발이 치렁치렁하고 더없이 느리고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머리가 더없이 울퉁불퉁한 걸 보면, 족장은 캐스비 노인에게 딱 맞는 별명이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인사하고, 화가와 조각가는 족장 모델을 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마음을 다해 끈질기게 졸라대는 걸 보면 예술계도 족장의 특징을 떠올리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같았다. 남자든 여자든 자선 사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 노인이 누구냐 묻고, “예전에 데시무스 타이트 바너클 경의 런던 소재 부동산 대리인이던 크리스토퍼 캐스비 노인”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아! 저런 표정을 지닌 사람이 왜 인류를 구원하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란 말인가! 아, 저런 표정을 지닌 사람이 고아의 아버지가 안 되고,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안 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지닌 당사자는 크리스토퍼 캐스비 노인으로 남아, 부동산 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저런 표정을 지닌 당사자가 지금 조용한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캐스비 노인이 그런 표정 없이 그곳에 앉아있길 기대하는 건 불합리의 최고봉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