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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세가 1

완역 사기세가 1

사마천 (지은이), 김영수 (옮긴이)
  |  
알마
2014-12-12
  |  
3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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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세가 1

책 정보

· 제목 : 완역 사기세가 1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중국철학
· ISBN : 9791185430386
· 쪽수 : 548쪽

책 소개

<사기>는 중국의 5,000년 역사 중 3,000년에 이르는 광대한 시간을 다룬다. 전설시대부터 시작해 하, 은, 주를 거쳐 백가쟁명의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와 고대 중국의 전성기 한 무제 때까지 광활한 역사가 장대한 필치로 그려진다.

목차

《사기》 총 130편 편명 일람|사마천 연보|사마천 천하유력도
역자 서문

세가 해제

권3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오나라의 기록
해제
권31 오태백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오‧초‧월 연표|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관련 서명표

권3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제나라의 기록
해제
권32 제태공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관련 서명표

권3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노나라의 기록
해제
권33 노주공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관련 서명표

권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연나라의 기록
해제
권34 연소공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관련 서명표

권35 관채세가管蔡世家- 채나라와 조나라의 기록
해제
권35 관채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

권36 진기세가陳杞世家- 진나라와 기나라의 기록
해제
권36 진기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

권37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위나라의 기록
해제
권37 위강숙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관련 서명표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송나라의 기록
해제
권38 송미자세가 한국어 번역문
명언·명구, 용어 풀이|주요 사건|관련 인명표|관련 지명표

참고문헌

저자소개

사마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역사학의 성인 ‘사성史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지금의 샨시성陝西省 한청시韓城市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교육 아래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갖추어나갔다. 스무 살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약 3년에 걸쳐 천하의 역사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팩트의 진실성과 그에 함축되어 있는 역사적 의미를 체험하는 뜻 깊은 행보를 실천으로 옮겼다. 이때의 경험은 3천 년에 걸친 방대한 역사서 《사기》의 출로를 모색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20대 중후반 예비관료인 낭중郎中으로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와 당대의 숱한 인재들과 교류하는 한편 황제 무제武帝를 지근에서 모셨다. 36세 때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른 후 38세 때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부 문서와 기록을 책임지는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이해에 고조선이 멸망했다). 마흔이 넘으면서 사마천은 아버지 대부터 수집해놓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서를 저술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98년 젊은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처남이자 장군인 이광리李廣利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혔다. 상황은 악화되어 반역죄에 몰려 사형이 선고되 었고, 사마천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역사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하여 죽음을 면했다. 50세 무렵 감옥에서 풀려난 사마천은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처절한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역사서 저술에 몰두했다. 약 3년에 걸친 옥살이와 궁형은 역사서의 방향과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사마천은 이 수모와 고독 속에서 인간과 세상, 권력과 권력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철저하게 숙고하는 한편, 나아가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와 같은 근원적 의문을 던지며 3천 년 통사를 완성했다. 이로써 《사기》는 역사에서 인간의 역할을 누구보다 깊게 통찰한 인류 최고의 역사서로 거듭날 수 있었다. 궁형은 사마천 개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불행이었지만 인류에게는 비할 데 없는 값진 선물로 남은 ‘역설적 악역’이었다. 궁형으로 인한 수염 없는 그의 초상화가 그 의미를 일깨운다. 한편 사마천의 죽음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병사, 자살, 행방불명, 처형 등 여러 설이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맴돌고 있다. 사가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를 대략 기원전 90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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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지난 30여 년 동안 사마천(司馬遷)과 《사기(史記)》, 그리고 중국을 연구하고 25년 동안 중국 현장을 150차례 이상 탐방해 온 사마천과 《사기》에 관한 당대 최고의 전문가이다. 저자는 지금도 사마천과 중국의 역사와 그 현장을 지속적으로 답사하며 미진한 부분을 계속 보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 《완역 사기》 시리즈를 비롯하여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 사마천, 삶이 역사가 되다》《절대역사서 사기 -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2》가 있고, 최근에는 《리더의 망치》《리더의 역사 공부 - 사마천, 우리에게 우리를 묻는다》《리더와 인재, 제대로 감별해야 한다》《사기, 정치와 권력을 말하다》《사마천 다이어리북 366》《인간의 길》《백전백승 경쟁전략 백전기략》《삼십육계(개정증보판)》《알고 쓰자 고사성어(개정증보판)》《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과 ‘간신(奸臣)’ 3부작인 《간신 : 간신론》 《간신 : 간신전》 《간신 : 간신학》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오십에 읽는 사기》《제왕의 사람들 》《난세에 답하다》《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제자백가의 경제를 말하다》 《사마천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막료학》 《모략학》 등이 있다. 편역자 연락처 페이스북 - Young Soo Kim 유튜브 - 김영수의 ‘좀 알자, 중국’ 블로그 - ‘김영수의 사기세계’ 밴드 - ‘좀 알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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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권3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사실 오나라는 서주와 춘추 초기까지만 해도 존재감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다. 그러나 춘추 후기 합려와 부차 대에 와서 강대국으로 떠올라 초나라와 월나라를 굴복시키고 급기야 중원 제후국들과 패권을 놓고 다툴 정도에 이른다. 사마천은 이 흥성의 과정은 물론, 월나라에 대한 방심과 무리한 중원 진출로 인해 어이없이 멸망하는 오나라 역사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상당히 긴박감 넘치게 서술한다._61쪽

계찰이 당초 사신으로 나서면서 북쪽 서국을 지나게 되었다. 서군(서국의 군주)이 계찰의 검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하였다. 계찰이 마음으로 알았지만 사신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야 하는지라 검을 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국에 들렀지만 군주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에 보검을 풀어 서국 군주의 무덤 위 나무에 걸어 놓고는 떠났다. 시종이 “서국 군주는 이미 죽었는데 누구에게 주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계찰은 “그런 말 마라. 당초 내가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죽었다고 내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_79쪽

19년(기원전 496년) 여름, 오가 월을 공격하자 월왕 구천은 취리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월은 결사대로 도전하였는데, 오의 군대 앞에 세 줄로 서서는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그었다.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이 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군대는 7리를 후퇴하였다.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차가 “어찌 감히”라고 대답하였다. 3년 뒤 월에 보복하였다._87쪽

월왕 구천이 무리를 이끌고 오에 인사를 드리고 많은 뇌물을 바치자 오왕이 기뻐하였다. 오자서만 “이는 오를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두려워하면서 “월은 뱃속의 근심거리입니다. 지금 제에서 뜻을 얻었지만 이는 자갈밭이나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반경지고〉에 보면 ‘화근은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 상이 이를 따라 흥하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오왕은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그 아들을 제의 포씨에게 부탁하고 돌아와 오왕에게 보고하였다. 오왕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내려 죽게 하였다. 죽기 앞서 오자서는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관을 짜고,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의 동쪽 문에 걸어 놓아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라고 하였다._90쪽


권3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강태공의 건국 방략이나 관중의 실용주의 정책에 대한 사마천의 높은 평가는 공리주의 색채가 짙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사마천은 좋은 정치를 행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책략적 수단이나 계책의 운용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인의仁義나 예교禮敎를 배격한 것이다. 요컨대 덕정이 공리나 실용과 결코 다른 개념이 아니며,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하는 정치와 정책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관중의 정치경제 사상을 긍정하면서 재부財富가 사회의식, 정신적 면모, 정치적 태도를 향상시킨다고 보았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이민利民’의 정치와 정책이야말로 최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마천의 실용적.공리적 입장은 더 나아가 강씨 정권을 찬탈한 전씨 정권에 대해서도 균형된 시선을 유지하게 한다. 즉 전씨의 정책이 백성의 인심을 사는 것이었으니 긍정할 만하다는 것이다._139쪽

서백이 사냥을 나서기에 앞서 점을 쳤더니 “얻을 것은 용도 이무기도,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패왕을 보좌할 신하를 얻을 것이다”라는 괘가 나왔다. 이리하여 서백이 사냥에 나섰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수 북쪽에서 여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몹시 기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선군이신 태공 때부터 ‘성인께서 주에 오시면 주가 흥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를 ‘태공망’이라 부르며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 스승으로 모셨다._145쪽

무왕은 상을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으며, 사상보를 제의 영구에 봉하였다. 동쪽 봉국으로 가던 중 길에서 묵느라 행차가 더뎠다. 여관 주인이 “제가 듣기에 시간이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하였는데, 손님은 아주 편히 자는 것을 보니 봉국으로 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소이다”라고 하였다. 태공이 이 말을 듣고는 밤중에 옷을 입고 나서니 날이 밝을 무렵 봉국에 이르렀다._149쪽
노 환공이 부인과 함께 제에 왔다. 제 양공은 예전에 노 부인과 사통한 적이 있었다. 노 부인은 양공의 배다른 여동생으로 희공 때에 시집가서 노 환공과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환공이 제에 오자 양공이 다시 사통한 것이다. 노 환공이 이를 알고 부인에게 성을 냈고 부인은 제 양공에게 이를 일렀다. 제 양공이 노의 국군과 술을 마시다 그를 취하게 한 다음, 역사 팽생으로 하여금 노의 국군을 안아 수레에 태운 뒤 늑골을 부러뜨려 죽이도록 하였다. 환공이 수레에서 내려졌을 때 이미 죽은 뒤였다. 노 사람들이 비난하자 제 양공은 팽생을 죽여 노에 사과하였다._154쪽

41년(기원전 645년), 진 목공이 진晉 혜공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돌려보냈다. 이해에 관중과 습붕이 모두 죽었다. 관중의 병이 깊어지자 환공이 “신하들 중 누가 재상이 될 만하오”라고 물었다. 관중은 “신하 알기로는 군주만 한 사람이 없지요”라고 답하였다. 환공이 “역아는 어떻소”라고 하자 “자식을 죽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환공이 “개방은 어떻소”라고 묻자 “부모를 멀리하고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환공이 “수도는 어떻소”라고 하자 “궁형을 자청하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세 사람을 기용하니 세 사람이 권력을 오로지하였다._164~165쪽

당초 의공이 공자였을 때 병융의 아버지와 사냥을 갔다가 사냥물을 다투다 이기지 못한 일이 있었다. 국군으로 즉위하자 그의 발을 자르고 병융은 노복으로 삼았다. 용직의 처가 아름다웠는데, 의공이 그녀를 궁으로 들이고 용직은 마차의 호위병으로 삼았다. 5월, 의공이 신지에 놀러갔을 때 두 사람이 목욕을 하면서 장난을 쳤다. 용직이 “발 잘린 사람의 자식!”이라고 하자, 병융은 “마누라 빼앗긴 놈!”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이 말에 부끄러워하며 의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함께 모의하여 의공과 대나무 숲으로 놀러가서는 두 사람이 마차 위에서 의공을 죽이고 대나무 숲에 버려 놓고 도망쳤다._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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