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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음악 > 음악가
· ISBN : 9791186561348
· 쪽수 : 344쪽
· 출판일 : 2016-11-30
책 소개
목차
들어가기 전에
Ⅰ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실수일 뿐”
Ⅱ 피아노로
Ⅲ 슈만에서 바그너로
Ⅳ “고결한 배신자들 만세!”
Ⅴ 바이로이트에서의 실망
Ⅵ 비극의 데카당스
Ⅶ 배우로서의 예술가의 초상
Ⅷ 지크프리트 대 파르지팔
Ⅸ “음악을 조심하라!”
Ⅹ ‘다카포’, 그리고 피날레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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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니체가 크게 은혜를 입은 중요한 ‘스승’ 쇼펜하우어가 그랬듯이, 니체도 음악적 메타포를 자주 동원한다. 건반, 끈의 진동, 불협화음, 화성, 선율의 메타포…… 이 메타포는 그의 말을 꾸며주고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은 생(生)의 메타포다. 태초의 인간과 문명이라는 화성(和聲)의 마그마, “심히 불안을 자아내는 근음(根音)”에서 떠오르고 차츰 분명해지는 선율에서 “자유로이 제멋대로” 나아가며 의욕과 “인간의 완전한 의식의 욕망”을 우리가 알아본다면, 음악은 생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의 메타포다. 그 음악이 정점에 도달할 때, 인류가 때때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보게 되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강력한 개인성”은 음악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의 “지속화음”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실수일 뿐’ 중에서
따라서 우리는 니체가 자기 글을 악곡과 동일시하여 『도덕의 계보학』을 3악장짜리 소나타라고 말할 때,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일종의 교향곡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 첫 권을 베토벤 교향곡 9번 의 첫 악구에 비유할 때, 이를 단순한 음악 애호가의 꾸밈이나 겉멋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아마도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음악에만 해당할 것이다”라고 쓸 것이다. 니체는 확실히 “들음(聽)의 재생”을 전제한다. 그러나 니체는 늘 깨어 있는 귀로 읽어야 하고, 이건 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읽기는 무엇보다 듣기이기 때문이다.
-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실수일 뿐’ 중에서
그렇지만 니체는 해석/연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작곡에도 손을 댔다. 대부분 황급하게, 괴테가 ‘악마적’이라고 일컬었던 힘, “일종의 광란”에 사로잡혀 쓴 곡이었다. “음악에서는 악마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나 아무도 그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니체는 “음악의 악마가 나를 사로잡았다”고 몇 번이나 편지에서 고백했다. 이 표현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1888년에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에 다시 천착하면서 그는 이 둘을 “예술이 자연의 힘(Naturgewalt)으로서 인간에게 표현되는 두 상태”로 보았다. 인간이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예술은 인간을 이용하여 비전을 보게 하든가 주신제(酒神祭) 상태에 이르게 한다. 니체의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다. “미신이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상위 힘의 화신, 대변자, 매개라는 생각을 물리치기가 심히 어렵다.” 그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영감이라는 현상의 시초에 대해서, 특히 자신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음악정신에서 탄생한 새로운 복음서다. “……찾지 않고도 듣고, 주는 자에게 구하지 않고도 얻는다. 사유가 번개처럼, 형식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강제로 밀고 들어온다. 내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 ‘피아노로’ 중에서
니체는 본능적으로 그중에서 예술을 가장 높이 쳤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 위계에서 으뜸은 음악이었고 그 점은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은 현상계와 완전히 독립되어 관조로는 파악되지 않는 의지의 본질 자체를 드러낸다. 오직 음악만이 인간이 잠시나마 개별성의 옹색한 한계를 뛰어넘게끔, 분리된 존재에 내재하는 고통을 초월하게끔 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음악이 미치는 효과는 “다른 예술의 효과보다 훨씬 강력하고 심오하다. 다른 예술이 그림자만을 말할 때 음악은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음악에는 말할 수 없고 은밀한 무엇이 있다. 음악은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낙원 이미지와 비슷하다. 음악은 지성으로 파악 가능하나 결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음악이 우리 존재의 움직임, 깊이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현실과 고통에서는 벗어나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 ‘슈만에서 바그너로’ 중에서
1868년 11월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만남을 니체는 “동화”처럼 이야기한다. 그는 바그너의 정신과 원기 왕성한 활력, “마법 같은 매력”에 푹 빠졌다. 니체는 처음으로 천재를 만났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천재성이 가장 확고하게 구현된 인물, 그랬다, 아주 세세한 특징까지도 빼다 박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된 쇼펜하우어, 그리고 이제 진짜 살아 있는 거장이 나타난 것이다. 니체의 부친과 바그너는 같은 해에 태어났으니, 니체는 바그너를 대하면서 어릴 적 여읜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1873년 5월에 그는 일명 “치천사와도 같은 아버지(Pater Seraphicus)”께 “당신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사산아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라고 고백한다. “당신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무서워 온몸이 떨립니다. 그랬다면 삶은 진정 살 만한 가치가 없었을 테지요. 다가오는 때를 어떻게 써야 할지 나는 전혀 몰랐을 겁니다.”
- ‘슈만에서 바그너로’ 중에서
니체는 이 반(反)디오니소스적인 그리스인과 함께 변증법과 그 창안자 소크라테스를 회복시킨다. “가장 소박하고 영원한 중개자이자 현자인 소크라테스”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는 이 계몽주의를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대혁명’과 그에 대한 ‘대반동’이 있었다는 것, 아니 양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것은 ‘우리가’ 타고 있고, 타기를 원하는 진정으로 위대한 파도에 비교하면 물결의 유희에 불과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즐거운 학문』에 이르기까지 니체는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할 규명 작업을 즐거이 논한다. 인간은 자기가 안다고 착각하거나 환영과 거짓에 눈이 멀어 현실을 보지 못한다. 물론 “그리스도교, 철학자, 시인, 음악가 덕분에 우리는 심오한 감동과 감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감동이 우리를 압도해버리지 않도록 학문정신을 환기해야 한다. 학문정신은 전체로서 다소 냉정하게 의심을 품게 하고, 특히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신앙의 뜨거운 흐름을 냉각시킨다.” 사실 형이상학은 “현실을 멸시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결국 ‘문명에 적대적’이다.” 음악 문화는 “과학을 거부한다.
- ‘음악을 조심하라!’ 중에서
니체는 본능을 높이는 동시에 육체를 자신이 항상 찾아왔던 근본 토대, “사물의 근간”으로 보는 경향을 나타냈다. “우리가 내려갈 수 있는 궁극의 사실”에 이념, 감정, 느낌은 “암호화된 언어”일 뿐이다. 그는 10년 전에는 이렇게 썼다. “더는 소급되지 않는 내 안의 궁극적 요소는 감각이다.” 거짓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는 부차적 현상에 지나지 않아 곧 밀려난다. 육체는 힘에의 의지의 해석자요, 해석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음악은 육체와 더불어 시작하지만 육체가 음악의 의미를 모두 끌어내지 못한다. 1862년에 그는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정신의 직관”은 감각이나 감정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인식하는 정신의 가장 정묘하고 드높은 부분”에서 나온다고 썼다. 음악은 신체를 통하여 정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 ‘다카포, 그리고 피날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