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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91186921678
· 쪽수 : 104쪽
· 출판일 : 2019-03-01
책 소개
책속에서
여러 아포리아 중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충분히 줄 수 없게, 충분히 환대할 수 없게, 제가 주는 현재와 제가 베푸는 이 대접에 제가 충분히 현존할 수 없게 하는 아포리아 때문에, 저는 주지 않아서, 결코 충분히 주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거나 대접하지 않아서 항상 용서받을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기증에 관한 한 우리는 무언가 늘 잘못했고, 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주지 않아서, 충분히 주지 않아서 용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유죄라고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줘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준 것 때문에 구하는 용서,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아포리아는 더 심각해집니다.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를 쉴 틈 없이 둘러쌀 수많은 아포리아 중 첫 번째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나 남성이 중재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해줄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용서의 장에서 오로지 두 당사자만이 마주해야 한다는 여건은 이름 없는 피해자 전체, 때로는 이미 죽은 익명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대표, 자손 혹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공동체, 교회, 기관, 조합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구하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박탈하는 듯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더 나아가 거의 용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적 권리, 징벌과 형벌, 공공기관, 사법적 전략의 지배에서 용서의 경험을 기이한 경험으로 만듭니다.
용서!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용서를 빈 적이 있던가? 단지, 죄인의 낙담과 비탄만이 용서에 의미와 존재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죄지은 자가 우적우적 잘 먹고, 잘 살고, ‘경제적 기적’으로 부유해진다면 용서는 한낱 불길한 농담일 뿐이다. 아니다, 용서는 돼지들과 그 돼지들의 암컷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만약 피고가 우리에게 동정심을 일으킨다면… 엄밀한 의미의 분별력이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그 동정심이 발생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억누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