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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91189171117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18-12-26
책 소개
목차
차례
책머리에
「최척전」과 「주생전」을 읽기 전에
「최척전」
쪽지로 전한 마음
지키지 못한 약속
너무나 짧았던 행복
뿔뿔이 흩어진 가족
만리타향에서의 재회
꿈에 그리던 조선으로 돌아오다
돛단배 하나로 망망대해를 건너
마침내 한곳에 모인 가족
작품 해설
「최척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주생전」
바람이 부는 대로
배도와의 만남
조약돌과 옥구슬
옥구슬을 훔치다
연적이 된 두 여인
배도를 묻고 선화를 떠나다
부치지 못한 편지
송도에서 만난 주생
작품 해설
「주생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최척전」과 「주생전」에 대하여
책속에서
수업을 마치고 물러나온 최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푸른옷을 입은 계집아이 하나가 문밖에 서 있다가 냉큼 뒤를 따랐다. 그리고 최척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비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최척은 이미 쪽지에 적힌 시를 보고 한바탕 마음이 들떴던 터인지라 왠지 모를 기대감에 휩싸였다. 필시 이 계집아이가 편지의 주인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던 것이다. 최척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쩐지 얼굴이 익숙한 것이 스승님 댁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하구나. 긴한 말이라면 길 위에서 하기 어려울 테니 일단 나를 따라
오너라.”
최척은 계집아이를 제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세한 사정을 묻자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낭자의 여종 춘생이라고 합니다. 아씨께서 저더러 선비님의 화답시*를 받아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최척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는 정 생원 댁에 딸린 여종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왜 그 댁의 아씨를 ‘정 낭자’가 아니라 ‘이 낭자’라고 하는 것이냐?”
춘생은 차근차근 대답했다. “제 주인댁은 본래 서울 숭례문 밖의 청파리*에 있었습니다. 주인 어르신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에 홀로 남으신 심씨 마님이 따님과 더불어 살고 계셨지요. 따님의 이름은 옥영(玉英)이라고 합니다. 좀 전에 시를 던진 분이 바로 옥영 낭자였답니다. 작년에 난리를 피해 강화도로 피란을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나주 근처의 회진†이라는 고을로 갔지요. 다시 올 가을에 회진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댁 주인이신 정 생원 어른께서 저희 마님의 친척이시라 잘 대해 주십니다. 단지 걸리는 것이라고는 지금 아씨의 혼처를 구하고 있는데 마땅한 신랑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점이지요.”
1. 최척 일가의 수난사, 네 나라의 국경을 넘나드는 광활한 상상력
「최척전」은 조선,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네 나라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매우 이채로운 작품이다. 게다가 각 지역에서 제각각 전개된 인물들의 삶이 삼십 년에 가까운 시간의 흐름과 특별한 공백 없이 촘촘하게 맞물려 있다. 웬만큼 조심성 있는 작가가 아니라면 고전 소설에서 연대와 시간의 착오는 흔히 발생하는 오류이다. 그러나 「최척전」의 서사는 철저히 계산된 시간표 아래에서 전개된다. 아마도 그것은 전쟁 등선명한 역사적 사건이 부분 부분의 변곡점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시아버지와 장모, 형과 아우가 네 나라로 흩어져 삼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하고 서글프게 서로를 그리워하다니. 적의 땅에서 살기를 도모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마침내는 단란한 가정으로 모여 모든 소원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필시 하늘과 땅이 그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이토록 기이한 일을 이루어 준 것이리라. 하늘도 한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는구나!
조선 백성으로 조선 땅에 살던 본래의 시공간을 제외하면 전쟁에 의해 헤어진 부부가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공간이 우선적으로 배경의 확장에 기여한다. 최척은 자발적으로 중국행을 결정하고, 옥영은 왜적에게 끌려 일본으로 가게 된다. 남은 가족은 천행으로 살아남아 조선에 머무른다. 중국과 일본에서 생활하던 부부는 우연히도 만 리 밖 바다를 건넌 이국땅에서 서로 만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 땅이다. 경자년(1600년) 봄이었다. 최척은 송우와 동행하여 장사꾼의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다가 안남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 최척의 배가 정박해 있는 포구에는 일본 배 십여 척도 와서 머물고 있었다. 사실 조선 내에서도 백 리 혹은 천 리를 자유롭게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대였다.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리 민족은 객지 혹은 타향을 선천적으로 두려워하는 농경 사회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최척과 옥영은 재회한 이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최척의 임시 거주 공간인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곳이 마치 최종적 정착의 공간인 것처럼 둘째 아들을 낳고 길러서 며느리까지 얻는다. 며느리는 중국인이니 말하자면 국제결혼이다. 이후 최척이 명나라 군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첫째 아들을 만나 조선 땅으로 귀환하고, 옥영 또한 거친 바다를 항해한 끝에 조선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난다. 물론 이렇게 짧은 요약으로는 그들이 겪은 일들이 얼마나 참혹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된 광활한 공간적 상상력과 30년 민족사를 장악하고 아우르는 통시적 역사의식은 「최척전」을 여러 고전 소설들 가운데 단연 이채롭게 만드는 뚜렷한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약돌과 옥구슬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난 주생은 전날 밤 배도의 방 근처에서 낯선 소리가 났던 것을 기억해냈다. 문득 궁금해진 주생은 배도에게 그 기이한 소리의 정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지난밤에 배랑의 방 근처에서 사람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잠깐 들렸는데, 이내 사라지더군요. 혹시 누가 왔었소?”
배도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 물가에 붉은 대문이 우뚝 선 크고 화려한 저택이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돌아가신 노 승상 댁입니다. 승상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그 부인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 두 남매만을 데리고 외롭게 살고 있답니다. 노 승상 댁 부인은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노래와 춤으로 달래곤 하시지요. 그댁에서 저를 부르려고 말과 사람을 보냈던 것이랍니다.”
주생은 그제야 사람 소리와 함께 말 울음소리가 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초저녁도 아니고 밤이 깊었는데 피곤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법이 있나?”
주생이 입을 쑥 내밀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배도는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났다. “제 재주가 마음에 드신 게지요. 가끔씩은 늦은 밤에도 부르곤 하신답니다. 하지만 어제는 낭군님도 계시고 하니 제가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던 것이지요.”
배도는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는 주생이 고마웠고, 주생은 대갓집 마님의 분부보다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배도가 더없이 미더웠다. 이후로 주생은 배도에게 흠뻑 빠져 바깥세상의 일을 잊고 살았다. 날마다 배도와 함께 거문고를 연주하고 술을 마시며 둘만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