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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91190429009
· 쪽수 : 402쪽
책 소개
목차
서언
국왕 리더십의 이상과 실제 • 7
1부
국운 융성의 리더십 • 17
Ⅰ. 왕업 개창 19
1. 태조와 조선 건국 19
2. 태종과 육조체제 31
Ⅱ. 국운 융성과 문화 창달 44
1. 성종과 <경국대전>·<국조오례의> 44
2. 영조와 <속대전>·<속오례의> 58
Ⅲ. 제국의 탄생 71
1. 고종과 대한제국 72
2. 황제와 환구단 84
2부
민생 안정의 리더십 • 97
Ⅰ. 농업 경영의 합리화 99
1. 세종과 <농사직설> 99
2. 정조의 농서대전(農書大全) 기획 107
Ⅱ. 수취 제도의 혁신 116
1. 세종의 공납제 116
2. 숙종의 대동법 124
Ⅲ. 군역 제도의 혁신 132
1. 영조의 균역법 132
2. 정조의 노비제 혁파 논의 141
3부
인재 양성의 리더십 • 149
Ⅰ. 인재 양성의 기반 마련 153
1. 태종과 과거 153
2. 세종과 관학 162
Ⅱ. 인재 양성의 중흥 174
1. 성종과 문신 정시 174
2. 중종과 사가독서 181
Ⅲ. 새로운 인재 양성의 길 192
1. 영조와 유생 과시 192
2. 정조와 초계문신 201
4부
군사 운용의 리더십 • 211
Ⅰ. 부국강병을 향한 새 군제 도입 213
1. 문종과 오위제 213
2. 선조와 훈련도감 223
Ⅱ. 국력의 발휘 235
1. 광해군과 심하 전투 235
2. 효종과 나선정벌 248
Ⅲ. 국정의 안정 260
1. 명종과 도적 260
2. 인조와 이괄의 난 271
3. 영조와 이인좌의 난 280
5부
복식으로 본 문화 창출의 리더십 • 289
Ⅰ. 새 시대를 여는 관복 294
1. 태종과 면복 294
2. 세종과 의례복 300
3. 성종과 관복 313
Ⅱ. 풍속을 바꾼 복식 324
1. 중종과 비단 324
2. 인조와 체발 333
3. 영조와 족두리 339
Ⅲ. 백성의 풍요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다 351
1. 성종과 양잠 351
2. 정조와 군복 361
3. 고종과 두루마기 370
참고문헌 • 380
색인 • 389
저자소개
책속에서
1. 태조와 조선 건국
1) 변방 무장에서 개국 시조
태조 이성계는 동북지방 출신으로 선대부터 그곳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이성계의 선계先系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는 1255년 다루가치[達魯花赤]로 경흥부 인근 알동[斡東]에 거주하였다. 목조의 아들인 익조는 함주咸州를 본거지로 하면서 귀화하는 여진인을 귀주歸州, 초고대草古臺, 왕거산王巨山, 운천雲天, 송두松豆, 도련포都連浦, 아치랑이阿赤郞耳 등에 이주하여 살게 하였다. 도조도 안변安邊 인근에 주재하면서 여진인을 관리하며 목축에 종사하였다고 실록에는 밝히고 있다.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인 실록을 보면, 이성계의 선계는 여진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혈연적으로 통혼通婚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성계의 가족이 무예에 출중한 것도 유목민족과의 교류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이성계가 공민왕 때 출사한 이후 동북면에서 변경을 개척하는 것이 용이하였다. 예컨대 1370년(공민왕 19) 정월 이성계는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이성계의 무공에 의해 지역민들이 진압된 면도 있었지만 귀순한 사람도 상당수였다. 이성계는 선대부터 한반도 북방 지역을 주도하는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변경에 대한 공식적인 본격적 활약이 가능했다.
이성계 일족이 여진 사회와 관계를 맺었던 것도 고려 조정에 이성계가 진출할 때 큰 역할을 한다. 여진족이 한반도의 왕조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가 고려의 동북면에 설치하였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무력으로 회복한 이후이다. 고려의 동북면은 쌍성총관부가 설치된 이후 고려의 유민과 여진족이 혼재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원으로부터 이 지역의 세습 작위를 지니고 있던 이성계와 이자춘李子春 부자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동북의 여진 중에서 경쟁 상대였던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물리치고 승리하였고, 1383년(우왕 9)에 고려를 침략한 호융도胡拔都를 제거하여 이 지역의 맹주로 자리 잡았다. 고려의 변경을 안정시키고 외적의 침략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망을 갖춘 것이다.
이후 이성계는 여진족의 귀순을 적극적으로 종용하여 고려말 동북 변경의 안정을 가져왔고 보위에 오른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동북의 여진족을 관리할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계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개국공신 이두란李豆蘭이 원래 여진의 추장 고론두란古論豆蘭 티무르[帖木兒]였다가 이성계에게 감화되어 귀순한 인물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일화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진과 이성계 일족의 관계는 조선 왕조의 건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셈이며, 그 배경이 동북면이었다.
동북면의 변경 지역인 함경도는 조선 왕조 개창자인 이성계의 선조가 활동을 하며 기틀을 잡은 곳으로 ‘조기지지肇基之地’,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곳은 개국 초부터 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상징으로 회자되던 곳이다. 따라서 이성계 가문과 함경도의 지역민, 특히 여진족과의 관계는 긴장보다는 우호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성계 가문의 누대에 걸친 노력과 이성계의 개인적인 위용으로 회유 내지는 포섭된 여진족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성계의 즉위 이후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은 관직을 수여받았고, 두만강 이남에 거주하던 자들은 모두 편호編戶로 편입되었다.
태조는 개국 초기인 1393년(태조 2) 여진 출신인 이지란李之蘭을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按撫使로 임명하여 지역 여진의 초무招撫와 변경 개척을 맡겼다. 이지란은 훗날 갑산과 경흥인 갑주甲州와 공주孔州에 축성築城을 하여 두만강 유역의 국경 방어거점을 정한뒤 지역 여진족을 귀순시키고 조선인과의 결혼 및 풍속을 습득하게 해서 군역과 조세 부담을 지니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태조는 이지란의 활동이 성공적이었다고 보고, 1397년(태조 6)에는 정도전을 동북면도선무순찰리사東北面都宣撫巡察理使로 삼아 지역의 행정기구를 설치하였다. 정도전은 안변 이북과 북청北靑 이남을 영흥도永興道로 하고 단천端川 이북과 경흥 이남을 길주도吉州道로 하였으며 주부군현을 설치하여 지역 행정체계를 재편하였다.
이상의 실록 내용은 이성계를 추앙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미화한 부분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여진족이 조선에 복속한 것은 이성계 개인의 지도력과 선대 집안이 대대로 여진과 관계를 맺어왔던 결과일 것이다. 이는 태종이 선대처럼 지역 여진에 대해 회유와 포용 정책을 쓰기보다는 군사적 활동을 위주로 하는 강압적인 정책을 써서 여진족의 반란과 공격으로 조선의 관군과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던 것과 비교가 된다.
원래 북방의 유목민족인 여진족은 정주定住해서 농경을 하던 조선 왕조 사회보다 호전적이었다. 여진족은 조선이 건국한 이후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모두 130회 이상에 걸쳐 조선의 북방 국경을 침략하였다. 그에 반해 조선은 여진에 대해 15회에 걸쳐 정벌전을 전개하였다. 세조 대에 이르러서도 여진은 연중 시기를 가리지 않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실제로 조선의 북방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다고는 하지만 겨울과 봄철의 갈수기에는 쉽게 넘어 올 수 있는 지류들이 많았다.
더욱이 여진족은 부족 단위로 움직이는 우수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농경보다는 유목과 수렵에 종사하였으므로 평소에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전술 체제를 몸에 익힌 준 군사집단이었다. 이런 무장 능력을 갖춘 여진족에 대해 조선 정부도 군사력을 동원하는 강경책 이외에 회유와 동화의 유화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유화책이 1405년(태종 5)부터 파견하였던 경차관敬差官이다. 경차관은 국왕의 명령을 받고 파견된 외교관으로 여진족의 대표에게 선물을 보내거나 효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차관은 여진족과 대마도에 파견되었으며 조선 초기 대외 갈등을 유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분쟁이 발생한 지역의 조사에서 해당 부족을 찾아가 질책하는 일까지 하였다. 경차관은 ‘경봉왕지敬奉王旨’가 주요 임무였으므로 국왕을 대신하여 명령을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그에 따라 경차관을 영접하는 여진 측의 의례도 조선 측에서 종용한 의례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경차관의 파견이 곧 그 지역 여론을 환기시키고 양측의 긴장관계를 해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