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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91192128108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2-03-18
책 소개
목차
인트로_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이야기
1장 세르반테스, 생명의 길을 찾아낸 군인
돈키호테 미스터리|펜 뒤의 또 다른 주인공|레판토 해전, 한 군인의 일장춘몽|스페인 제국, 한 시대의 일장춘몽|꿈, 활자에 갇히다|길, 꿈을 깨다|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2장 기(起) : 무지가 빚어낸 세계
키하노, 소설에 미치다|기사소설, 자발적 무지의 역습|산초, 희망에 미치다|풍차와 달리기—생명을 전도시키는 무지|양떼와 이름들—무지를 증식시키는 언어|눈 먼 자들의 눈부신 세계|첫 단추는 늘 잘못 꿰어진다
3장 승(承) : 길에서 숨 쉬는 타자들
길과 타자, 생생함의 비밀|기사소설 팬들의 등장|삶은 현실과 허구 사이로 흐른다|광인들의 이야기|여자들의 이야기|불한당들의 이야기|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없는 세상
4장 전(轉) : ‘자아’라는 이름의 위기
‘나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포부|책 출판—꿈은 이루어진다?|자아를 설계하는 법|명성, 나를 갱신하라|위작, 나를 증명하라|독자, 나는 내 것이 아니다|위기의 본질은 자아다
5장 결(結) : 깨어진 꿈들의 축복
정신의 막다른 골목|산초의 비상(飛上)|희망을 잃은 자의 행복|돈키호테를 깨운 대포소리|실패, 예정된 승리|마지막 독서의 시간|복된 죽음과 끝없는 자유
아우트로_꿈은 언제나 현실이다
부록_산초 판사의 말 말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돈키호테』에는 두 가지 음조가 이중주처럼 섞여 있다. 세상을 일방적으로 오독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아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는 근본적 무지, 그리고 타인과 생생하게 뒤섞이면서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근본적 생명력. 전자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어릿광대로 낮춰 보고, 후자에 꽂힌 사람들은 그를 거룩한 이상주의자로 드높인다. 그러나 삶에서 이 두 얼굴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씨실과 날실처럼 끈끈하게 엮여 있다. 삶의 진솔한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두 가지 운동이 전부 필요한 것이다.
이 양단을 종합해 내는 것이 마음의 저력이다. 이 저력의 이름은 지성과 지혜다. 지성은 ‘나’라는 한계를 넘어서 더 큰 세상의 맥락을 이해할 줄 아는 힘이다. 우리는 이 힘으로 위기가 드러내 준 무지를 낱낱이 분석하고, 그 무지가 어떻게 타자들과 연결되고 또 연결되지 못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작업을 제대로 마치면 ‘끝’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 위기가 닥쳐서 내 계획이 어그러지고, 내 행동이 실패하고, 내 믿음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더라 도 그것이 곧 세상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철옹성마냥 붙들고 왔던 정신세계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역으로 기회가 생긴다. 지금까지 무지가 무지인 줄도 모르고 살면서 ‘나’를 중심으로만 기억했었던 과거를, 이제는 세상을 중심에 두고 새 이야기로 ‘리라이팅’해 볼 기회 말이다.
다시 시작하는 생명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끝이 있어 좋다’는 이 진실 앞에서 무지와 생명력이 만난다. 돈키호테가 모험 내내 한 일도 이것이었다. 그는 길 위에서 온 생명의 힘을 다해 자신의 무지를 타인들과 섞이는 이야기로 바꾸어 내었다.(「인트로_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이야기」)
이 강경한 태도는 일상에 충만함을 가져오기는커녕 광기의 불씨를 지피는 무지로 손쉽게 뒤집힌다. 라만차의 남자를 보라. 그는 풍차를 향해 질주한다. 세상의 모든 장소와 삶의 모든 순간, 자신의 존재까지도 기사소설의 필터로 거른다. 스스로의 목숨을 걸었으니 이보다 더 진정성 있는 실천은 없다.
돈키호테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다음의 사실은 변치 않는다. 돈키호테는 세상과 삶에 대한 명징한 깨달음 속에서 목숨의 집착을 비운 게 아니다. 그의 ‘목숨 건 실천’은 앎이 삶보다 더 중요해져 버렸다는 ‘전도’(顚倒)를 보여 줄 뿐이다. 결국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명분의 숭고함도 상관없다. 질주하고 있는 마음이 무지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한, 배타적인 정신과 헌신적인 행동이 합치되는 순간 삶의 에너지는 무지의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진정성이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삶은 사실상 내가 버리지 못하는 무지일지도 모른다.(「2장_기(起) : 무지가 빚어낸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