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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91195445394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16-04-0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01 양위 讓位
가까운 사람이 아닌 능력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라 -요(堯)
02 충정 忠情
공을 성취하고 천하를 얻으려면 과감하게 결단하라 -이윤(伊尹)
03 토사구팽 兎死狗烹
어려움은 함께해도 부귀와 영화를 함께 누릴 이가 아니다 -범려(范蠡)
04 절치부심 切齒腐心
20여 년의 대하 복수극을 통쾌하게 마무리하다 -손빈(孫臏)
05 천고일제 千古一帝
위대한 공적을 세웠으나 죽음은 예측하지 못하다 -진시황(秦始皇)
06 지지 知止
공을 이루고 나면 용감하게 물러나라 -장량(張良)
07 선종 善終
태산에 올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맹서하다 -무제(武帝)
08 가도사벽 家徒四壁
가진 것이 없어도 여유롭게 책과 문장을 즐기다 -사마상여(司馬相如)
09 마상치지 馬上治之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육고(陸賈)와 장창(張蒼)
10 애국충절 愛國忠節
너 같은 매국노는 반드시 죽여 없앨 것이다 -소무(蘇武)
11 골육상잔 骨肉相殘
나라를 세우는 대업을 이루고도 후계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다 -이연(李淵)
12 정관지치 貞觀之治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고 충고를 받아들여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다 -이세민(李世民)
13 일인지하만인지상 一人之下萬人之上
현명한 군주를 만나 삼공의 자리에 오르다 -이적(李勣)
14 유일무이 唯一無二
정치적 수완은 정교하게, 수단은 가차 없고 잔인하게 -무측천(武則天)
15 맹성 盲聖
눈이 멀었다고 정한 일을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 -감진(鑒眞) 스님
16 월하독작 月下獨酌
달빛 아래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 -이백(李白)
17 금궤지맹 金櫃之盟
맹서를 새겨 후대에 전하다 -조광윤(趙匡胤)
18 원모심려 遠謀深慮
가족을 돌보고 가풍을 지키다 -진성화(陳省華)
19 경력신정 慶歷新政
사사로운 욕망에서 벗어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라 -범중엄(范仲淹)
20 신법 新法
변화와 개혁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다 -왕안석(王安石)
21 청백리 淸白吏
나아가도 물러나도 오로지 백성을 걱정하다 -해서(海瑞)
22 난득호도 難得糊塗
총명하기도 어렵고 멍청하기도 어렵다 -정판교(鄭板橋)
23 분골쇄신 粉骨碎身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치다 -임칙서(林則徐)
24 청렴결백 淸廉潔白
호남은 단 하루라도 좌종당이 없으면 안 된다 -좌종당(左宗棠)
25 일대종사 一代宗師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바른 교육에 몸에 던지다 -채원배(蔡元培)
26 문무겸비 文武兼備
진정한 무인은 문으로 완성된다 -풍옥상(馮玉祥)
참고 자료
저자소개
책속에서
범려는 구천에게 ‘십년교훈(十年敎訓), 십년생취(十年生聚)’라는 원대한 국가 전략을 제시했다. ‘10년 동안 지난날의 실수를 교훈으로 삼고, 10년에 걸쳐 인구와 생산력을 늘려’ 복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복수심에 불타 섣불리 오나라를 공격했다가는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범려의 이런 책략은 훗날 중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사나이 복수 10년 뒤라도 늦지 않다’ 등 중국 특유의 복수관을 형성하게 했다.
토사구팽(免死狗烹) | 범려(范蠡)
생전에 사마상여는 벼슬을 원했지만 정작 벼슬살이는 그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았다. 지병을 핑계로 실제 직무에는 간여치 않고 글을 짓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살았다. 때로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무제의 정치를 풍자하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정색을 하고 뛰어들지는 않았다. 또 공부를 좋아하긴 했지만 매달리지 않았고,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집착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마치 진사익(陳四益)이 ‘죽도록 책만 읽지(死讀書)’ 말고, ‘죽은 책을 읽지(讀死書)’ 말 것이며, ‘책읽다가 죽지(讀書死)’ 말라고 충고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가도사벽(家徒四壁) | 사마상여(司馬相如)
무측천이 죽기 전날 대신들은 뒷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무엇보다 비문을 놓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쟁점이었다. 칭송하자는 신하들, 공과를 동시에 기록해야 한다는 신하들, 찬탈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논쟁은 식을 줄 몰랐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무측천은 비석은 세우되 내용은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평가를 후대에 맡기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비석은 ‘무자비(無字碑)’로 남게 되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냉정하면서 담담하게 상황을 판단했던 것이다.
유일무이(唯一無二)| 무측천(武則天)
이백은 뜻이 원대하고 성품이 고결했다. 그는 명성을 위해 학문을 이용하면 갈수록 바보가 되고 말 것이라고 판단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백은 자신이 넘쳐흘렀다. 그는 자신을 춘추시대 관중(管仲)이나 삼국지의 영웅 제갈량, 그리고 위진남북조 시대의 명사사안(謝安) 등에 비유하면서 바보들이나 보는 과거 따위와 같은 시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의 재능을 꼭 필요로 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 이백(李白)
손자사위를 포함하여 네 명의 장원과 진사 급제자를 배출한 진성화 집안은 말 그대로 명문가 중에서도 명문가였다. 진성화 역시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속된 말로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성화는 이런 가문의 영광 뒤에 숨은 그림자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것은 바로 자식들이었다. 자칫 자식들이 잘못 처신하면 자식은 물론 온 집안이 오명을 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소 이른 은퇴를 결심했다. 진성화는 집안을 단속하며 자식들이 공직 생활을 바로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진성화의 말년은 바로 이런 원모심려(遠謀深慮)의 결과였다.
원모심려(遠謀深慮) | 진성화(陳省華)
해서는 1566년 자신의 관을 미리 짜놓은 다음 죽음을 각오하고 ‘치안소(治安疏)’로도 불리는 ‘천하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해 바로 아룁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황제의 숱한 단점들을 통쾌하게 지적했다. 상소문에서 해서는 전국적으로 탐관오리들이 설치고, 무거운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생계를 제대로 유지 못하고,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황제의 책임이며 모두 황제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대개 천하의 백성들이 황제를 안중에도 두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대담하게 결론지었다.
청백리(淸白吏) | 해서(海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