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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역사학 > 역사학 일반
· ISBN : 9791197971990
· 쪽수 : 532쪽
· 출판일 : 2024-11-15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_그렇게 그들은 살아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목정원)
Ⅰ.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Ⅱ. 쓸모없는 지식
Ⅲ. 우리 나날들의 척도
역자 후기_몸의 정치, 몸의 시, 몸의 윤리
추천의 글_샤를로트 델보라는 세계, 진실한 기억과 연대의 예술이 시작된 곳
리뷰
책속에서
“저것 봐, 저것 봐.”
처음엔 본 것을 의심한다. 흰 눈과 뚜렷이 구분된다. 마당 한가운데 그게 있다. 벗은 나체들이. 서로 맞붙어 줄지어 있다. 새하얬다. 눈 위에 있어 약간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하얀색이다. 머리는 완전히 밀렸고, 음부의 털은 뻣뻣하게 섰다. 시체들은 얼어 있다. 하얀데 손톱만 밤색. 위로 쳐들린 발가락들은 좀 우스꽝스럽다. 너무나 터무니없고 끔찍하게. (...)
이제 마네킹들은 눈 속에 누워 있다. 겨울 햇볕에 잠겨. 이 볕은 아스팔트 위 태양을 상기시킨다.
눈 속에 누워 있는 마네킹들은 어제의 동기들이다. 어제, 점호할 때만 해도 그녀들은 있었다. 다섯씩 정렬하여, 라거슈트라세 양쪽에 서 있었다. 그녀들은 작업장으로 출발했고, 습지 쪽으로 갔다. 어제 그녀들은 배가 고팠다. 이가 있어 몸을 긁었다. 어제 그녀들은 더러운 수프를 마셨다. 그녀들은 설사했고, 구타당했다. 어제 그녀들은 고통스러워했다. 어제 그녀들은 죽기를 희망했다.
이제 그녀들은 여기 눈 속에 벌거벗은 시체로 있다. 그녀들은 블록 25에 죽어 있다. 블록 25에서의 죽음에는, 죽음에서 흔히 기대되는 고요도 평화도 없다. -<마네킹> 중
눈이 굴절된 빛 속에서 섬광처럼 빛난다. 퍼지는 빛살은 없고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 빛만 있다. 모든 게 잘린 듯 날카로운 윤곽선으로 새겨져 있다. 하늘은 파랗고, 단단하고, 얼어 있다. 빙하 속에 갇힌 식물들이 떠오른다. 빙하가 수중 식물까지 얼려버리는 북극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린 그런 식물들처럼 얼음덩어리 속에 갇혀 있다. 단단하고, 잘린 듯 날카롭고, 투명해 마치 수정 같기도 한 얼음 속에. 그리고 빛이 이 수정을 관통한다. 마치 빛이 얼음 속에서 얼어버린 듯, 아니 마치 얼음이 곧 빛이기라도 한 듯. 우리가 이 얼음덩어리 속에서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우리는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고, 발로 바닥을 굴러본다. 1만 5천 명의 여자들이 발을 구르고 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이 폐기된 환경에 있다. 이 얼음 속에서, 이 빛 속에서, 이 눈이 멀 것처럼 눈부신 눈 속에서 우리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얼음, 이 빛, 이 고요. -<이튿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