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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98117960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3-02-10
책 소개
목차
엮는 말 • 4
거리의 목가 • 8
해바라기 • 108
일표一票의 공능功能 • 133
가을과 산양 • 153
산정山精 • 166
도시와 유령 • 176
주리면 • 200
행진곡 • 212
책속에서
정식의 긴 코스 동안 영옥은 더 많이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과실을 먹고 차를 마실 때에 난데없는 한패가 별안간 등 뒤로부터 몰려 들어와서 영옥을 놀라게 하였다. 민수와 낯모를 남녀와의 세 사람이었다. 명호와 단둘만의 그 자리를 민수에게 보인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못 되었다. 민수는 위인이 데설데설하고 시원스럽기는 하였으나 그 반면에 경한 데가 있어서 애란이 처음에 소개할 때에도 특별히 주의하라고 은근히 귀띔하여준 인물이었다. 첫째 그의 굵은 알의 누런 안경이 비위에 거슬렸고 터놓고 선전하는 그의 독신주의라는 것이 수상하였다.
“소개를 할까요.”
바로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나서 민수는 영옥의 편을 보았다.
“방송국 문예부의 남구 씨. 강남회사 전속 가수 박인실 씨.”
남녀를 소개한 후 영옥을 마저 그편에 소개하였다. 이가 바로 그들인가 하고 영옥은 전부터 소개하겠다고 벼르던 남구와 인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인사의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모두 그 방면의 유명한 사람들이며 앞으로 기어이 길을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들임을 깨닫고 영옥은 일종의 감회와 흥분을 느꼈다.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 ‘거리의 목가’ 중에서
제 궁리에 잠겨 있던 판에 다따가 먼 곳에서 찾아온 동무의 자태는 퍽도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몇 해 만이건만 주름살 하
나 없는 팽팽한 얼굴에 여전히 시원스러운 낙천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싸움의 기억에 잠겨 있는 판에 하필 자네가 찾아올 법이 있나.”
“싸움두 무던히는 좋아하는 모양이지.”
“욕을 받구까지야 가만있겠나.”
“싸웠으면 싸웠지 기억은 뭔가. 자넨 아직두 그 생각하구 망설이는 타입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야. 몇 세기 전의 퇴물림을. 개운치두 못하게 원.”
“핀잔만 주지 말구―센티멘털리즘의 필요라는 건 어떤가?”
“센티멘털리즘으로 타협하잔 말인가, 싸우면 싸웠지 타협은 왜. 싸움이란 결코 눈앞에서 화다닥 끝나는 게 아니구 길구 세
월 없는 것인데 오랜 후의 결말을 기다리는 법이지 타협은 왜―.”
“자네 낙관주의의 설명인가.”
“낙관주의 아니면 지금 이 당장에 무엇이 있겠나. 방구석에 엎드려 울구불구만 있겠나.”
- ‘해바라기’ 중에서
그렇게 터놓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친구의 비위를 건드리지는 않은 듯 그도 속임 없는 한 꺼풀 속 심경을 감추지는 않았다.
“사실 나두 그게 격식이라기에 사람을 본받아 흉내는 내봤으나 일을 하면서도 흡사 연극을 하고만 있는 것 같으면서 맘속이 텁텁해 못 견디겠어. 대체 무슨 큰 수가 있어서 그것을 하노 하구 피곤한 뒤에는 반드시 맘 한 귀퉁이가 피곤해. 내게 무슨 할 일이 없다구 그 짓을…….”
과는 달랐어도 함께 학문을 공부하고 학술을 연구한 그 동기 동창의 솔직한 마음속일 듯싶었다. 서른을 가제 넘은 젊은
학사의 속임 없는 하소연인 듯싶었다.
“의원의 하는 일이 불필요야 하겠나만 자네를 그 역할에 앉힌다는 것이 아무래두 희극이야. 양복을 입구 고깔을 쓴 것 같아서 격에 어그러져 뵈거든.”
“내 할 일을 내가 간대루 모르겠나…….”
동창의 얼굴은 불그레 물들고 눈은 온화하게 빛난다. 상위에는 맥주병이 어느새 수북이 늘어섰다.
“나이가 늦었다면 또 모르거니와…… 적수공권의 알몸이라면 또 모르거니와.”
- ‘일표의 공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