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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도가철학/노장철학 > 장자철학
· ISBN : 9791198420619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6-10-23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1편 기대지 않는 삶 / 소요유
소요하는 삶
대신하지 않는 삶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 없는가
2편 길은 하나로 통한다 / 제물론
하늘의 퉁소
허망하게 작동하는 마음이란
옳고 그름은 어떻게 가려지는가
길은 하나로 통한다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
나는 옳고 너는 그른가
장자는 누구고 나비는 또 무엇인가
3편 앎이 아니라 삶을 도모해야 / 양생주
앎이 아니라 삶을 도모해야
양생을 터득했노라
현재를 살아야
4편 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 인간세
상대는 어떻게 변화되는가
꺼려지는 일이 닥쳤을 때
껄끄러운 사람과 지내야 할 때
세속의 쓸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생명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
불완전함의 완전함
공자와 접여
5편 진정한 ‘살힘’이란 / 덕충부
말 없는 가르침
육신 너머를 보라
사람이 내리는 형벌과 하늘이 내리는 형벌
‘살힘’이 온전한 자
진정한 망각
호불호의 감정 따위
6편 삶의 참 스승 / 대종사
참사람이 있어야 참앎이 있다
삶의 기운은 삶 속에 감춰야
생명의 ‘큰길’
나는 도를 들었소이다
변화를 놀라게 하지 말라
틀 밖에서 노니는 사람
변화를 기다릴 뿐
노니는 경지란
좌망이란
명(命)이란 무엇인가
7편 분분한 세상 속에서 / 응제왕
한번은 말이 되고 한번은 소가 되고
‘살힘’을 속이는 짓
그 무엇도 없는 곳에서 노니리라
현명한 지도자는
아무리 신통한 점쟁이라도
혼돈의 지혜
참고문헌
책속에서
소요하는 삶
소요하는 삶은 결국 기대지 않는 삶이다. 작은 자아에 기대지 않아야 소요하는 삶이다. 그러니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고 이름에 기대지 않을 때 진정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름에 기대지 않는 것은 누군가의 인정이나 세상의 평판에 기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기’, ‘무공’, ‘무명’에서 ‘무’는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없애가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하늘의 퉁소
남곽자기가 안석에 몸을 파묻고 앉아 하늘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마치 짝을 잃은 사람 같았다. 앞에 서서 시중을 들던 안성자유가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체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이 마치 식은 재처럼 되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걸상에 몸을 기대고 계신 모습은 지난날 걸상에 몸을 기대던 모습이 아닙니다.”
南郭子?隱机而坐, 仰天而噓, ?焉似喪其?. 顔成子游立侍乎前, 曰,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机者, 非昔之隱机者也.”
시중드는 안성자유와 스승으로 보이는 남곽자기가 등장한다. 제자의 눈에 스승이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나 보다. 짝은 상대다. 좋은 일이든 논쟁이든 시시비비든 상대가 있기 마련인데, 오늘 남곽자기에게는 아무런 짝이 없는 듯하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은 얽히고설키면서 감정이 일어나는데, 스승은 마치 식은 재처럼 고요하다.
스승은 바로 그 이유를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우화의 핵심어다. ‘나’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자신의 본질을 상실했다는 말이 아니라 남에게 내세우려는 ‘나’를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스승은 그 이야기를 퉁소로 들려준다.
수많은 모양의 구멍에 바람이 지나가면서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는 마치 고집하는 생각의 구멍에 바람 같은 외부의 사건이 지나가면서 감정이 생기는 것과 같다. 남곽자기는 남에게 내세우는 ‘나’라는 것이 없으므로, 고정된 구멍이 없는 셈이다. 고집하는 하나의 구멍이 없기에 소리가 나지 않기도 하겠거니와, 고집하는 ‘나’를 잃어버리고 수많은 ‘나’가 될 수도 있기에 어떤 소리도 낼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은 어떻게 가려지는가
‘큰길(도)’은 무엇에 은폐되기에 참과 거짓이 있게 되며, 말은 무엇에 은폐되기에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가? 어디엔들 ‘큰길’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어디에 있은들 말을 할 수 없겠는가? ‘큰길’은 작은 성공에 은폐되고, 말(의 뜻)은 화려함에 은폐된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다. 한쪽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한쪽은 옳다고 하고, 한쪽이 옳다고 하는 것을 한쪽은 그르다고 한다.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옳다고 하는 바를 그르다고 여기고 싶다면, ‘밝음으로써’ 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墨之是非,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무리마다 주장하는 ‘큰길(도)’이 있다. 이쪽에서는 이것이 ‘큰길’이라고 하고 저쪽에서는 저것이 ‘큰길’이라고 한다. 한쪽이 참이면 다른 쪽이 거짓이 되는 논쟁이 있다. 그렇다면 ‘큰길’은 무엇에 가려지기에 참과 거짓이 생겨나는 것인가? 말은 무엇에 가려지기에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가? ‘큰길’은 어디엔들 존재하지 않겠는가? 어느 쪽(입장)에 있든 말할 수 없겠는가? 소소한 성공으로 ‘큰길’을 주장한다면 ‘큰길’은 소소한 성공에 가려지고, 화려한 표현 탓에 말의 뜻은 가려지게 마련이다.
‘밝음으로써’ 한다는 것은 비유다. 자신에게 갇힌 어둠을 벗어나 분명하게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일 그른 일 너머에 들판에 있네. 우리 거기서 만나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