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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평전

지석영 평전

(빛과 어둠을 살다 간 근대 과학자)

김현주 (지은이)
과학과이성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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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평전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지석영 평전 (빛과 어둠을 살다 간 근대 과학자)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인물
· ISBN : 9791198502810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24-10-31

목차

머리말

제1장 역병 천연두를 없애라

1.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다
2. 개항, 강제적 경제 침탈
3. 천연두 바이러스, 조선에 착륙하다
4. 종두법을 배우다
5. 조선에게 『조선책략』이란
6. 임오군란이 불러들인 외세와 개화 정책
7. 갑신정변으로 개화파 몰락하다
8. 『종두신설』 저술하다

제2장 정치적 세력 다툼 속에서

1. 갑신정변 이후 정치 상황
2. 전염병의 재유행
3. 동학 농민군의 봉기와 갑오개혁
4.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제3장 동학 토포사로 임명을 받다

1. 고종, 동학 농민군 봉기에 외세를 끌어들이다
2.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그리고 을미의병

제4장 근대 의학의 꿈을 이루다

1. 춘생문 사건과 아관 파천
2.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거주했던 동안
3. 지석영을 10년 유배형에 처하라
4. 의학교를 설립하다

제5장 러일 전쟁의 혼란 속에서

1. 근대로 향하는 대한 제국의 지식층
2. 망국의 위기는 관료층에서부터
3. 두 차례의 전쟁으로 매독이 성행하다
4. 의학교에서 국문 연구소로
5. 일본의 야욕
6. 폐하께서 두려워하실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7. 국문 연구를 통한 지석영의 애국
8. 감염병의 대유행과 대한 제국 의사들
9. 한국인의 대대적인 이민이 시작되다

제6장 식민의 시대를 살다

1.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지석영
2. 한일 합방으로 친일파가 득세하다
3. 개화의 어둠 속에서
4.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며

『지석영 평전』 해설
지석영 연보
『지석영 평전』을 전후한 한국사 연표
참고 문헌

저자소개

김현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98년 계간 《문학과 사회》 단편소설 「미완의 도형」 당선. 송순문학상 수상. 광주일보문학상 수상. 광주대학교 인문사회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및 같은 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소설집 『물속의 정원사』ㆍ『메리 골드』, 장편소설 『붉은 모란주머니』, 평전 『지석영 평전: 빛과 어둠을 살다간 근대 과학자』, 산문집 『네번째 찻물』 출간. 전 장성도서관 독서토론강사. 현) 광주전남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위원장. 문예지 《작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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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의학과 개화사상을 공부하고 있었던 지석영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선 땅에 역병 천연두가 곳곳에서 출몰했고,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개항 후, 부산에 일본인들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지석영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왜관 인근부터 여러 감염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은 흉측했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감염 지역을 늘려가고 있었다. 페스트ㆍ콜레라ㆍ두창 등의 전염병이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왜관에 상륙한 일본 거류민들은 자체적으로 방역을 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감염병에 매우 취약한 상황이었다. 민심은 전염병의 공포로 인해 흉흉해졌고 무능한 조선 정부와 무도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지석영은 한약재와 한의학 기술만으로는 천연두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승 강위를 통해 북경에서 수입한 외국 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공부했지만 막상 천연두가 확산되자, 번역 이론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천연두로 인해 어린 조카를 잃은 슬픔이 마음 한구석에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마을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부모들은 천연두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무당을 불러 큰돈을 지출할 뿐이었다. 살아나면 다행이고, 죽더라도 조상의 탓이라고 말하는 무당을 원망할 수 없었다. 요행을 바랄 뿐, 아무 대처도 없이 천연두에 걸렸다 하면 대부분 죽어 나갔다. 아이를 잃은 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만 했고, 마을마다 슬픔과 한탄을 못 이기는 곡소리와 넋두리는 끊기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나라의 영향력과 간섭은 극대화되어, 고종은 청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강한 힘을 빌려 올 계획을 세웠다. 이 때문에 개화파 지석영도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초급 관리로서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운영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도화원 출신 김용원의 도움과 민영목의 힘을 빌려 관립 촬영국을 함께 열어 고종의 사진을 처음 촬영했다. 한성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개화파를 무조건 싫어했다. 갑신정변이 수습될 당시, 사람들이 지운영의 개인 사진관에 들어와 기물과 건물을 파괴시켰다. 사진관은 근대 문물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운영은 급진 개화파에 의해 후원자 민영목이 살해되자 큰 곤경에 빠졌다. 그는 김옥균이 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사업까지 망쳤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1885년 11월 3일, 지운영은 참판 민병석을 만나 김옥균 암살에 대해 논의했다. 이틀 뒤인 11월 5일 고종을 만난 지운영은 김옥균을 암살하겠다고 자청한다. 정변의 실패로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고종과 왕비 민씨는 이들을 추적해서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나 이미 한 차례 실패한 이후였다. 1886년 1월 10일, 고종은 지운영을 불러 국서와 여비 5만 원을 건넸다. 국서에는 지운영을 ‘도해포적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바다를 건너 역적을 잡는 특사로 임명한 것이다.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에서 출발해서 나가사키, 고베를 거쳐 도묘에 도착한 후, 김옥균 일행과 접촉했으나 미리 알아챈 일행들의 방비로 인해 암살은 실패했다. 지운영은 무예에 출중한 협객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의 암살 계획은 너무나 허술했을까. 오히려 김옥균 측근들에게 속아, 고종의 국서와 여비까지 모두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김옥균은 지운영을 경계했다. 지운영과 민영목, 민영목과 왕비 민씨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지운영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인간적인 판단이 미흡했기 때문에 오히려 김옥균 일행의 신고로 도묘의 교바시 경찰서에 투옥되었다가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이 암살 사건이 알려진다면 정치적으로 난처하게 될 상황이었으므로 지운영을 모르쇠로 대했다. 의금부가 지운영의 뒷조사를 할 뜻을 비췄으나 고종은 밀명을 내리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제 맘대로 다니면서 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지운영을 엄하게 다스리라.” 했고, 급하게 유배형을 내렸다.


이완용은 25세에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1886년 9월 23일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인 육영 공원의 학생으로 특별히 선발되었다. 그는 민영익과 유길준이 의견을 내어 설립한 육영 공원에서 29세에 선발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육영 공원에서는 헐버트ㆍ길모어ㆍ벙커 세 명의 미국인 교사가 초빙되어 최초의 영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교육이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친미적 성향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완용은 정치의 출발점부터 근대 교육의 수혜를 누렸고 친미 세력의 힘을 등에 업고 있었다. 따라서 출발점부터 지석영과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석영은 과거급제 전에 이미 종두장에서 백성들을 치료했고, 친일 개화파의 세력 안에 있었다. 일본에 직접 가서 종두법을 배워온 열정으로 그는 백성들의 천연두 접종에 온 열정을 기울이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육영 공원에서 미국인 선생들로부터 수학했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했고, 자연스럽게 미국과의 교역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또한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까닭에 갑신정변의 수습 과정에서부터 타국과의 정보가 부족한 고종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러나 워낙 조심성이 많은 까닭에 예민한 고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개화파의 완전한 축출을 위해 척사파 대신들과 힘을 모았다.
지석영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887년 3월 30일에 직언을 하듯 상소를 올린 것이다. 4월 12일 이완용은 지석영을 문초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며 상소문을 올렸다. 지석영과 김옥균의 친분을 이유로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지석영은 국문을 받은 후, 당일에 유배지로 떠나게 된다. 이는 이완용 등이 올린 상소문을 고종이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석영과 이완용은 정치 성향부터 지나치게 차이가 났다. 성격이 올곧고, 융통성이 없는 데다 오직 관직의 직무에 충실했던 지석영을 왕실의 동향에 빠르게 대응한 이완용이 그냥 두지는 않았다. 세계 정치의 흐름과 실리적 권력에 민감했던 이완용은 미국과의 교류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고종의 편에서 친일 개화파를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완용은 지석영이 정계에서 처음 맞닥뜨린 악연인 셈이었다. 그들의 뒤틀린 인연은 한일 합방에 이를 때까지, 이완용이 죽을 때까지도 수없이 충돌하면서 지석영의 입지를 뒤흔들어 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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