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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동유럽소설
· ISBN : 9791199653009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26-02-10
책 소개
이제부터 각자의 생존이 시작된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옛집에 몰래 숨어 사는 무능한 아빠를 마주하고 충격에 빠져 가출하는 십대 소녀 마리안나, 타국에서 고립된 채 소진되다 결국 자신을 위한 비상구를 찾아내며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엄마 한나, 평생 전문직으로 일하며 누구보다 단단하게 자아를 지켜오다 돌봄 노동에 투입되면서 자괴감에 빠진 할머니 알리치아…….
무책임한 가장이 남긴 부채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견뎌내며 새 삶을 꾸려가는 여성 3대의 이야기!
김겨울 작가 추천!!!
가족이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서로를 발견하다
『상실』은 작가로도 번역가로도 요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정보라 작가가 직접 해외 직구를 통해 발굴하고 번역한 작품이다.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SNS에서 보고 당장 해외 직구로 주문했다. 기자가 쓴 소설이기 때문에 막연히 딱딱한 내용의 르포 소설이나 범죄 소설을 생각했다. 그런데 십대 소녀 주인공의 관점과 생각들에 대한 생생하고도 세밀한 묘사, 가족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모으고 이어서 상실된 거짓과 남은 진실을 밝히는 방식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_옮긴이의 말에서
빚 때문에 가정이 붕괴되어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된 십대 소녀 마리안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빠인 그제고시가 무모하게 저지른 일 때문에 속절없이 궁지로 내몰린 채 바닥으로 치닫게 되는 세 여성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매우 섬세하고도 정밀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절망의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치지 않는다. 알리치아와 한나, 마리안나가 그려가는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삶이란, 그중에서도 가족의 삶이란 조그맣고 일상적인 모든 순간들의 ‘합’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상실』은 결국 그렇게 쌓이고 쌓인 순간들이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 이면에 숨어 있던 진실이 잔인하리만치 낱낱이 까발려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렇게 은밀히 옹송그려 있던 진실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뒤에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보편의 진리와 맞닥뜨리게 된다는 거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었던,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오던 한 가정이 거짓으로 허술하게 가로서 있던 안정을 ‘상실’한 끝에야 진짜 가족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상실의 폐허 위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단단한 여정!
지극히 평범해 보였던 한 가정의 비극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빠인 그제고시가 가족들 몰래 막대한 빚을 지면서 시작된다. 한순간에 경제적 위기에 몰린 그제고시와 한나는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면서, 열네 살 마리안나와 열한 살 야쿱을 노년의 알리치아에게 떠맡긴다.
작품은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사춘기 소녀 마리안나의 시선을 통해 가정의 위기를 섬세하게 묘사해 나간다. 마리안나에게는 부모의 부재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상실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족보다 더 사랑했던 반려견 ‘프라이다’와의 이별이다. 마리안나는 상황에 대한 이해력은 있지만 통제력은 전혀 없는 자신의 처지가 프라이다와 꼭 닮았다고 느끼며 깊은 그리움에 빠진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 알리치아의 낯선 태도를 마주하며 가족이라는 관계의 여러 측면을 새롭게 발견해 나간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공증사무소에서 일하며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꾸리는 독립적인 여성 알리치아는 그동안 가족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는, 냉정한 삶의 방식을 고수해 왔다. 그녀는 걸핏하면 사고를 치는 아들을 뒤치다꺼리하는 일에 지쳐 있는 데다, 갑자기 떠맡게 된 손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깊은 혼란과 갈등에 휩싸인다.
반면에, 마리안나의 엄마 한나는 자식들의 생활을 꼼꼼히 챙기며 낯선 외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이들 걱정뿐인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정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찾아와도 결국 자신의 행복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랄까. 한나가 담아내는 ‘어머니’ 상은 한국의 어머니들과도 놀라울 만큼 짙게 닮아 있어서 공감의 폭을 한층 돋운다.
이처럼 상반된 가치관을 지녔을 뿐 아니라 사사건건 대립과 갈등을 연출해 온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리안나의 가출이라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묘한 연대를 시작한다. 마리안나를 찾아나서는 여정 속에서 두 여성은 각자가 가졌던 ‘온전한 가족’에 대한 환상과 기만을 털어내고 낯설지만 명료하게 서로를 응시하게 된다.
마침내 켜켜이 쌓인 일상의 순간들이 무너지고, 그 이면에 숨어 있던 비정한 진실들이 드러나는 과정을 추적해 나가지만 이 작품은 결코 파멸로 치닫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시스템이 붕괴된 뒤에도 삶은 계속되며, 그 이어진 길 위에서 세 여성은 각자의 자리를 덤덤히 찾아간다. 결국 안정이라는 신기루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슬픔이 아니라 각자의 상실을 껴안고 나아가는 여성들의 단단한 발자국 소리인 셈이다.
이렇듯 『상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를 비롯해 명망 있는 문화계 인사들을 수없이 인터뷰했던 베테랑 기자 출신 작가 나탈리아 쇼스타크가 인생의 한 단면을 지독하리만큼 섬세하고 철저하게 포착해 낸 덕분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묘한 힘에 이끌리게 된다.
목차
상실
작가의 말
리뷰
책속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알리치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였다.
직장이 있었고, 지인이 있었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리고, 벽에 부딪히고, 창문에서 방향을 돌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원하든 원하지 않든—귀를 기울였다. 가끔은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어 선생님 조금, 경찰관 조금, 그리고 심리학자 조금. 왜냐하면 잘 들어줄 줄도 알았기 때문이다.
매니시 스타일로 매끈하게 잘 다듬은 머리 모양은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것 같았고, 입을 전혀 열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기척이 들렸다. 높은 장화가 포석을 때리는 소리, 뒷굽이 만들어내는 일정한 리듬. 지나치게 빠르지 않으면서 어딘가 위엄이 있는 박자였다. 왜냐하면 아주 급할 때도 뛰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다려줄 것이다, 언제나 기다리니까.
서두르느라 숨을 헐떡거리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약함을 드러내는, 즉 경우에 맞지 않는 옷, 지워진 매니큐어, 구두와 색깔이 똑같은 가방, 피부색에 맞지 않는 립스틱 같은 것이다. 그녀는 약함을 허용할 수 없었다.—아니,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것은 어쩌면 견딜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그냥 짧은 순간일 뿐이니까 말이다. 막상 가서 생활해 보니 자신이 채소를 얼마나 먹는지, 배구연습을 하러 가는지 아무도 매일같이 지켜보지 않고, 수업은 8시 50분에 시작하는데 아침 7시에 준비하라고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지내기가 훨씬 더 좋을지도 모른다.
프라이다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개와는 영상통화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개가 슬픔에 빠졌을 때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도 않는다. 보러 갈 수는 있겠지만 차가 없으면 힘들 것이다. 버스 노선 하나가 몇 시간마다 한 번씩 다니는 게 끝이다. 그렇다면 학교 수업시간 중에 프라이다를 보러 가야 할 것이다. 이건 어쩔 수가 없다. 학교가 마리안나 없이 알아서 할 일이다.
택시 승강장 쪽으로 가서 택시 타고 시내로 들어간 뒤 거기서 집까지 버스 타려고 했는데, 유리 너머의 뭔가 때문에 걸음이 느려지다가 결국 서버리고 말았다. 외투 앞섶을 열어젖힌 여자가 담배를 너무 빨리 피워서 마치 먹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을 머리 한가운데 동그랗게 묶었고, 신발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불안한 얼굴로 게걸스럽게 담배 피우는 모습이 마치 수술실 앞에서 수술 결과를 기다리는 보호자 같아 보였다. 나는 그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이해하려 애썼다.
마치 선 채로 잠들었던 듯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쓴다. 여행가방, 핸드백, 작은 가방, 휴대폰, 여권, 전부 다 있었다. 숨을 고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택시가 어느 쪽이었더라? 택시 말고 버스를 탈까? 더 싼데. 시내 교통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 언젠가 버스 탔던 게 기억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왜 공항에서 집으로 갔지?
나는 넋을 잃고 걷다가 여행가방이 화분에 부딪히자 그제야 몸을 돌렸다. 다시 보고서야 처음부터 명백했던 것을, 매우 당연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시어머니 알리치아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를 알아보았지만 내 쪽으로 오지 않고 담배를 또 하나 피워 물고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