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이성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b
19,800원 | 20251205 | 9791192986517
도서출판 b에서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동서양 고전의 산실, ‘b판고전’ 시리즈의 30권째 책은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역사 속의 이성〉이다. 이 책은 역시 도서출판 b의 헤겔 연구 시리즈인 ‘헤겔 총서’ 11권과 헤겔의 저서인 〈엔치클로페디: 1권 논리의 학〉에 이어 나온 또 한 권의 헤겔 저서다. 도서출판 b가 국내의 헤겔 연구에 있어 권위 있는 번역자인 이신철 선생과 함께 내고 있는 헤겔의 저서 및 연구서가 벌써 13권째에 이른다는 점은 철학 등 정통 인문학 출판의 하향세 속에서 빛나는 성취라 할 만하다.
헤겔은 〈피히테와 셸링 철학 체계의 차이〉,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요강〉 등 오직 5권의 책만을 생전에 출간하였다. 그래서 헤겔 전집을 구성하는 다른 책들은 대부분 헤겔의 강의 원고나 학생들의 필기 노트에 기초하여 사후에 편집된 강의록들이다. 헤겔의 강의는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 철학, 정신 철학, 법철학, 국가학, 역사 철학, 미학, 예술 철학, 종교 철학, 신학, 철학사 등 광범위하다. 그중 역사 철학과 관련해서 헤겔은 베를린 대학에서 1822/23년 겨울 학기에 처음으로 ‘세계사의 철학’을 강의했고, 이후 2년마다 네 차례씩 이어졌다. 역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헤겔이 꾸준히 다루고 있으나, ‘세계사의 철학’ 강의와 더불어서야 비로소 역사는 헤겔 철학의 체계 속에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헤겔이 논의하는 ‘역사 철학’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헤겔이 쓴 강의 원고와 청강자들에 의한 필기록 그리고 그것들을 편집한 책들을 읽어야만 한다.
헤겔 사후에 ‘세계사의 철학’의 전체 면모를 제시하기 위해 헤겔의 강의 초고와 강의록들을 토대로 하여 기획된 〈역사 철학 강의〉는 지금까지 네 종류가 편집되었다. 편집자의 이름에 따라 붙여진 이 〈강의〉는 간스 판, 칼 헤겔 판, 라손 판, 그리고 호프마이스터 판이다. 각각의 판은 나름의 장단점을 가진다. 이중 호프마이스터는 지금까지 편집되어온 판의 ‘서론’이 1822년 강의를 위한 원고와 1830년의 강의를 위한 원고라는 전적으로 다른 두 원고에 기초하여 편집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두 원고를 구별하여 제시했고, 헤겔 자신이 쓴 원고와 필기록에 토대한 것을 서로 다른 글자체로 구별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헤겔 ‘세계사의 철학’의 통일적인 형태를 복원하여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는 〈역사 철학 강의〉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미가 있으며, 호프마이스터 판을 옮긴 이 〈역사 속의 이성〉 역시 여전히 헤겔 ‘역사 철학’의 텍스트를 공부하고 이를 제대로 탐구할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소중한 자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전문적 연구 성과이자 정교한 독일 서지학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헤겔을 알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들의 ‘교양’을 위해서도 추천할 만하다. 헤겔의 저서를 바로 읽으며 이해하고 교양을 쌓기에 헤겔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너무나 난해하다. 특히 헤겔 자신이 출판을 염두에 두고 철학의 체계를 잡기 위해 집필한 책들은 구조에서부터 단어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계획과 구상에 의해 구상되고 선택되었기에 그렇다. 이에 비하면 학생들에게 ‘역사 철학’을 강의하기 위해 작성한 강의록과 이를 받아 정리한 학생들의 필기록은 그 악명 높은 난해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이해가 용이하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 철학, 그중에서도 그 백미인 헤겔의 역사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라면 먼저 〈역사 속의 이성〉을 읽은 후 〈정신현상학〉으로 넘어가는 게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헤겔은 세계사란 역사 속에서 ‘인간적 자유의 이념’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논의하고,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세계사의 궁극 목적을 ‘역사 속의 이성’이라고 명명한다. 현실 역사를 세계 정신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파악하는 헤겔의 독창적인 역사론은 헤겔 철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역사 속의 이성〉이라는 그의 ‘세계사’ 강의를 읽으면서 19세기 초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 강의를 듣는 학생이 되어, 세계사를 자신의 철학으로 체계화하려 했던 놀라운 철학자의 육성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를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