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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김창협 (지은이), 송혁기 (옮긴이), 최채기 (감수)
한국고전번역원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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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88928404100
· 쪽수 : 340쪽
· 출판일 : 2016-09-19

책 소개

한국고전선집.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은 그의 사상사.문학사적 성취를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과 역정, 나아가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상.사회상까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목차

한국고전선집을 펴내며 4
김창협은 누구인가 13

제 1 장 학문의 길 위에 서다
어린 날의 추억, 해주 25
나의 스승 정관재 28
책선(責善)해 주는 벗이 있어 33
시험에 떨어진 동생에게 37
성악설 비판 41
금강산 유람기 48
도봉서원에서 우암의 시에 차운하다 58

제 2 장 은거를 마음먹다
월출산 구정봉에 오르다 63
애틋한 마음 나눌 형제들이 있어 66
얼음 뜨는 노래 68
환경을 탓할 것인가 환경을 바꿀 것인가 71
험한 산골에 사는 이유 75
고을살이는 거문고 연주와 같으니 77
고관 자제의 곤궁한 은거 82
나귀 빌려주어 고맙네 89
자신의 깨달음이 없으면 93
은거의 자세 97

제 3 장 의리로 세상을 논하다
나의 수명 덜어서라도 꽃다운 너의 생을 이어 줄 수 있다면 105
솜씨 좋은 대장장이의 자식이 가죽옷도 잘 만든다 112
어른이 된다는 것 116
의문 없이는 학문도 없음을 왕에게 가르치다 121
역졸 아이 녀석의 풍류 125
시다운 시란 무엇인가 126
변방에서 130
약소국의 살 길 132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 140
한가위 달빛 아래 작은 배에 누워서 150
어리석은 뒷집 부인의 충고 152

제 4 장 아버지와 스승의 죽음을 겪다
어느 달 밝은 밤 흥에 겨워서 157
스승을 위하는 마음과 공정한 판단 159
아버지의 묘표를 스승에게 부탁하다 164
마음을 잠재우다 172
폭포를 찾아서 178
풍경이 되어 버린 사람, 사람으로 완성되는 풍경 183
꼼꼼한 『논어』 읽기 189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198
벼슬할 수 없는 이유 208
아버지 대신 지은 동생의 묘지명 214
절교를 선언하다 220

제 5 장 학문을 논하고 문학을 평하다
하나뿐인 스승으로서 내 어이 자넬 잊겠는가 227
성정과 천기로 지은 시 236
요절한 젊은이와 외로운 노인을 위하여 240
지(智)와 지각(知覺)은 어떻게 다른가 245
조선의 문장을 평하다 250
눈 오는 밤 산사에서의 약속 255
맑은 밤 밝은 달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259

제 6 장 시련 속에서 학문을 꽃피우다
조선 시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 265
시 벗 아들을 잃다 272
둘째 딸마저 연이어 잃다 278
퇴계와 율곡을 넘어서 사단과 칠정을 논하다 283
청의 지배와 중화 문명 292
슬픔의 금강산 297
조선의 학자를 평하다 301
화창한 봄날 병상의 와유 306
병든 몸에 쌓이는 글 빚 309

제 7 장 학문과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다
졸기 317
학문 320
문장 323

연보 328
참고 문헌 337

저자소개

김창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安東, 자는 仲和, 호는 農巖이다. 1682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 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부친 金壽恒(1629~1689)이 기사환국으로 인해 사사된 이후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여 노론 洛論系의 宗匠이 되었다. 문학적으로는 韓歐正脈을 표방하여 당시 조선 문단의 의고주의적 문풍에 변화시킨 대표 문인이다. 그의 문집으로 『農巖集』이 전하며, 이외에 학습서인 『八大家門十選』 등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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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조선시대 문학비평 및 산문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한문 고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서 나누는 영역으로 글쓰기를 확장하고 있다. 저술뿐 아니라 신문 칼럼 연재와 강연 등을 통해 인문학의 사회적 확산에 기여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이다. 주요 저서로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2006), 《나를 찾아가는 길-혜환 이용휴 산문선》(공저, 2014), 《농암집-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2016), 《고전의 시선》(2018), 《나만이 알아주는 나-조귀명 평전》(2021), 《Anthology of KOREAN Classical Prose》(공저, 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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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채기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연수부, 상임연구부) 졸업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現) 논문 및 역서 <退溪 李滉의 朱子書節要 編纂과 그 刊行에 관한 硏究>, <圃隱集의 編纂과 刊行에 관한 硏究>, <한국에서의 朱子文集 수용방식> 등 ≪拙藁千百≫, ≪記言≫(공역), ≪明齋遺稿≫(공역), ≪弘齋全書≫(공역), ≪星湖全集≫(공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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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김창협은 누구인가

김창협 학문과 문학의 특징은 남다른 주장이나 새로운 표현을 내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시되는 통념의 근저를 철저하게 파고들고, 다들 알고 있는 미의식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있다. 이 작은 선집으로 그 진면목을 다 맛보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이룬 학문과 문학의 정수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할 때 이 선집이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김창협은 누구인가」중에서

제 1 장 학문의 길 위에 서다

적막하고 텅 빈 산에 사당 문은 열려 있고 空山肅肅廟門開
푸른 바위 맑은 시내 좌우로 감아 도네 碧石淸泉左右廻
이 산수에 귀의함이 당시의 뜻이었건만 可惜當年丘壑志
임금님이 붙드셔서 못 오신 일 애석하네 君王不放此間來

☞ 청년기 김창협의 시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23세(1673)에 지은 이 작품이 문집 처음에 실려 있다. 현전하는 김창협의 첫 번째 시가 송시열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며, 그 시의 제재를 이루는 배경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위패를 모신 도봉서원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 「도봉서원에서 우암의 시에 차운하다」중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주도면밀하지 못하다는 말은 참으로 따끔한 지적이었네. 바깥일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을 섬기고 모시는 데 있어서도 번번이 이러한 문제가 생겨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곤 하네. 이전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몰랐는데, 지금 이처럼 지적을 받고 보니 더욱 깊이 반성하게 되네. 어떻게 해야 그 문제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 부디 다시 가르쳐 주기 바라네.

☞ 4살 연하의 처남이 던지는 지적에 김창협이 한 번이라도 평정을 잃고 반응했다면 책선(責善)이 평생 계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창협은 설혹 완전히 동의하기 힘든 지적이더라도 매번 이를 절실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서 철저한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충고를 해 주는 벗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였다.
- 「책선해 주는 벗이 있어」중에서

제 2 장 은거를 마음먹다

오랜 이별 아닌 줄 알고 있지만 亦知無幾別
그래도 이 밤만은 길고 또 길었으면 聊復永今宵
대열 끊겨 고개 넘는 외기러기 슬피 보며 斷行悲嶺鴈
이별의 한스러움 강물 위에 부치노라 離恨寄江潮
여구곡 짧은 노래 목청 돋워 부르나니 歌唱驪駒短
멀리서도 잉어 편에 소식을 전하시게 書傳赤鯉遙
고향 동산 꽃나무는 그대로 있겠지만 故園花樹在
찬란한 봄날 와도 적막하고 적막하리 春色久寥寥

☞ 실각하여 유배된 아버지와 그를 따라 먼 타지에 내려온 아들들이 시를 통해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는, 지금은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풍경에 담긴 것은 아직 작은 시련과 길지 않을 이별로 인한 안타까움 정도이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로 인한 고통이 극심해졌을 때, 형제들은 위로와 애정을 나누며 김창협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존재였다.
- 「애틋한 마음 나눌 형제들이 있어」중에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길에 나갈 마음을 접고 세상일을 끊은 채 깊은 산 험한 바위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으니, 곤궁하여 굶주리는 일이며 초췌하게 살아가는 모양은 바로 저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나서 또 그것 때문에 후회한다면, 목욕하는 자가 젖기를 꺼리고 불 쬐는 자가 뜨거움을 꺼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우둔하다고는 하나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

☞ 가상으로 설정한 손님의 입을 빌려서 말한 자신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고생 모르고 자란 서울내기 고관 자제가 이런 궁벽한 산골 생활을 견딜 수 있겠느냐는 우려이다. 이에 대해서 김창협은 천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 「고관 자제의 곤궁한 은거」중에서

제 3 장 의리로 세상을 논하다

가련하다 저 들국화 따는 사람 하나 없어 可憐野菊無人採
이슬 내린 풀숲 속에 붉은 꽃잎 쓸쓸하네 丹蘂蕭蕭露草中
오늘에야 알아보고 머리 위에 꽂았나니 今日得歸頭上揷
말고삐 잡은 아이 녀석 네가 풍류를 아는구나 風流却在馬前僮

☞ 1684년(34세) 8월 암행어사로 영남 지역을 잠행하던 길에 얻은 소품 같은 시이다. 길가에 흔하게 피어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들국화. 그 버려진 아름다움이 역졸 아이 녀석의 머리에 꽂혀 풍류가 되었다. 순간을 포착하여 담아낸 시선과 발상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 「역졸 아이 녀석의 풍류」중에서

전하께서 처음 재이를 만났을 때부터 진정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덕을 닦아 기강을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기를 그동안 교지에 하신 말씀처럼만 하셨더라면, 하늘이 벌써 기뻐하고 재이가 벌써 소멸되었을 것이고, 옛날 은 중종과 주 선왕에 견주어도 될 정도로 성대한 중흥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어찌 오늘에까지 다시 재이를 근심하여 거듭 번거롭게 교서를 내려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실 일이 있으셨겠습니까. 신은 여기에서, 전하께서 이전의 재이에 대해 꼭 진심으로 두려워할 줄 아신 것이라 할 수 없으며, 매년 내리신 교지도 꼭 성심에서 나왔다고만은 할 수 없음을 알겠습니다.

☞ 본디 재이로 인한 구언에는 상소 내용을 문제 삼아서 처벌하지 않을 테니 기탄없이 직언해 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내밀하고 민감한 사안 앞에서 숙종이 분노로 인해 그 원칙을 스스로 깬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신하들의 간언에 숙종은 오히려 더 격분하여 거친 말을 쏟아 내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중에서

제 4 장 아버지와 스승의 죽음을 겪다

달 밝은 밤 밝게 웃고 떠드는 소리 月明笑語喧
누각 위에 우리 딸들 노니는구나 樓頭兒女游
푸른 강은 얼음 녹아 봄날 같은데 綠江渙如春
둥실둥실 떠가는 한 쌍의 청둥오리 花鴨一雙浮
아이들은 주렴 걷고 바라보느라 卷簾相指似
추운 밤 누각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夜寒不下樓
늙은이 혼자 앉은 바로 이 순간 老子方獨坐
빈 배 마주하고 나직이 시를 읊노라 微吟對虛舟

☞ 때론 너무나 행복한 모습이 바로 뒤에 닥쳐올 위기를 예견케 하듯이, 딸들의 발랄한 즐거움과 자신의 홀로 누리는 흥이 멋들어지게 그려진 이 작품에서 불과 한두 달 뒤에 불어닥칠 광풍과도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상된다. 작가 본인은 이후 전개될 일들을 알지 못했겠지만 찰나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해 낸 작품이다.
- 「어느 달 밝은 밤 흥에 겨워서」중에서

창업(昌業 1658~1721)이 전에 「분매(盆梅)」 시를 짓고 화운시를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승낙만 하고 짓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말씀 드려 보았더니 선친은 즉석에서 입으로 읊고 써서 보여 주었는데, 표현과 의사가 분명하고 시에 담은 뜻이 더욱 깊고 완곡하였습니다. 이처럼 사약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며칠 동안 선친은 시문을 짓고 편지를 쓰는 것과 자고 먹고 말하고 웃는 일상이 모두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 이 편지가 절절하게 담아낸 그 기구한 상황과 함께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가족들의 동요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김수항의 의연함이다. 정쟁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평상심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김수항,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먼저 간 동지의 묘지명을 써 주는 송시열의 모습에서 오늘날 쉽게 만나기 힘든 거대한 인간상을 마주하게 된다.
- 「아버지의 묘표를 스승에게 부탁하다」중에서

제 5 장 학문을 논하고 문학을 평하다

시는 성정(性情)의 산물이니, 오직 천기(天機)를 깊이 체득한 사람만이 잘 지을 수 있다. 도량은 좁아터지고 식견도 어두우면서 그저 평측과 율격을 맞추는 데 급급하여 특이한 구절을 쥐어짜 꾸미고 다듬는 것으로 솜씨를 과시하면서 시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에게서 어찌 참다운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 시는 형식적 조탁이나 전문적 수련으로 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작가의 성정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드러내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 김창협 시론(詩論)의 핵심이다. 앞서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인용한『잡지』외편에서 보았던, 성정이 발현하고 천기가 작동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시의 실례를, 김창협은 송남수의 시에서 본 것이다.……
- 「성정과 천기로 지은 시」중에서

본성은 마음이 갖추고 있는 이치이고 마음은 본성이 담겨 있는 그릇이라 하였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바로 본성을 말하는 것이니 그 본체는 지극히 정미하여 볼 수가 없고, ‘허령(虛靈) 한 지각(知覺)’은 바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 작용은 지극히 신묘하여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본성이 아니고서는 마음에 준칙이 있을 수 없고, 마음이 아니고서는 본성이 운용될 수 없으니, 이것이 마음과 본성의 차이입니다.

☞ 김창협의 논점은 인의예지의 본성 가운데 하나로서의 ‘지’와 마음의 활동인 ‘지각’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김창협이 자신과 함께 공부하는 형제 및 문도들의 편지를 동봉함으로써 점차 확대되어 갔고, 나중에는 권상하와 한원진(韓元震 1682~1751)등의 호서 학자들이 김창협의 견해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18세기 초반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 「지(智) 와 지각(知覺)은 어떻게 다른가」중에서

제 6 장 시련 속에서 학문을 꽃피우다

거사가 예전에 일가의 요절한 여인을 위해 묘문(墓文)을 지은 적이 있는데, 딸이 당시에 그 글을 보고 “이분은 그래도 우리 아버지의 문장을 얻어 그 이름이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으니, 그 죽음이 불행하지만은 않구나.”라고 말했다. 또 간혹 명중에게 “저는 여자라서 공덕을 세워 세상에 드러날 길이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차라리 일찍 죽어서 우리 아버지의 글 몇 줄을 얻어 묘소의 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김창협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영영 이룰 수 없는 소원을 가지게 된 딸에게 마지막으로 허망하게 물음을 던진다. “이제 과연 그 소원을 이루었느냐?” 이 물음이 허망한 이유는 지금 이루어 주는 이 소원이 딸이 지녔던 진짜 소원과는 너무도 거리가 멂을, 김창협 스스로 잘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조선 시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중에서

퇴계가 학문을 논한 글은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은 주자 이후의 대학자로서 저술이 적지 않았는데도 학문을 논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간혹 한두 편이 있지만, 퇴계의 글처럼 정밀하고 적절하고 상세하고 정성스럽지는 않다.

☞ 김창협은 철저하게 주자학에 입각한 학문의 관점을 강조하였으나, 그렇다고 그의 학문 태도가 교조적이거나 권위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배 학자들이라 해도 장점과 단점을 나누어서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학문적 토론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 「조선의 학자를 평하다」중에서

제 7 장 학문과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다

우리 유가의 도를 앞장서서 밝히고 학문이 순수하고 덕을 갖추었으며 성현의 깊고 은미한 뜻을 드러내어 후세를 열어 준 공으로 말하자면 정암, 퇴계, 율곡, 농암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정암, 퇴계, 율곡에 대해서는 이미 옛 선비들 사이에 정해진 평가가 있지만, 농암은 지금의 시대와 그다지 멀지 않아 그의 덕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아, 공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니, 백세 뒤에 진정한 선비가 나온다면 나의 말에서 취할 점이 있을 것이다.
- 오희상(吳熙常 1763~1833), 『노주집(老洲集)』「잡지(雜識)」중에서

☞ 농암 김 선생의 학문은 육경과 성리학에서 나왔다. 그 문장을 읽어 보니 기운이 성대하여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낸 것이 없고 표현이 치밀하여 더하거나 뺄 곳이 전혀 없다. 전아하고 장중하며 온화하고 단아하여 바른 군자의 모습에 가깝다고 한 옛사람의 말 그대로다. 편지글의 주도면밀함은 고정(考亭 주희)을 그대로 따랐고, 제문의 살을 에는 슬픔은 창려(昌黎 한유)와 은근히 합치된다. 수백 년 이래 뛰어난 문장이다.
- 송백옥(宋伯玉 1837~1887), 『동문집성(東文集成)』「농암김선생문초인(農巖金先生文鈔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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